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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2)/ 교회의 신분과 영적인 실존 (묵시7,1-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01 조회수700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1. 1. [모든 성인 대축일] 도란도란글방(2)

 

 교회의 신분과 영적인 실존

 

(묵시7,1-17)

1 그 뒤에 내가 보니 땅 네 모퉁이에 천사가 하나씩 서서 땅의 네 바람을 제지하여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2 또 보니 다른 천사 하나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땅과 바다를 해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이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말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4 그리고 내가 들은 바로는 도장을 받은 자들의 수효가 십사만사천 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마에 도장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5 도장 받은 자는 유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르우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가드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6 아셀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납달리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므나쎄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7 시므온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레위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이싸갈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8 즈불룬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요셉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 베냐민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었습니다. 9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 양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그러자 천사들은 모두 옥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옥좌 앞에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아멘, 우리 하느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찬양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세력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하고 외쳤습니다.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으며 하느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옥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가리워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요, 17 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첫 번째 인부터 여섯 번째 인의 내용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네 말 탄자로부터 비롯되는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등의 재앙이 교회 시대를 통해 세상에 임하게 되는데 그 재앙에 교회인 하느님의 백성들도 그대로 노출이 됩니다. 세상은 전부 그렇게 재앙을 통해 최후의 종말을 향해서 마지막 죽음(死亡)을 향해서 파괴되어지고 멸망해 가는데,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그 재앙이 오히려 그들의 신자 됨을 훈육하고 가르치는 복이 된다는 것을 배웠지요? 그러나 그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면에서 우리 신자들은 모두순교자(殉敎者)’로 불린다는 것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세상 모든 인간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 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서 산과 바위에게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려라.’ 고 외칠 정도로 그 하느님의 진노(震怒)의 불길은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요한이 여섯 번째 인의 재앙에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누가 그 진노에서 건짐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면서 6장을 마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인()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일곱 번째 인은 우리가 다음에 공부할 8장에 나옵니다. 그 여섯 번째 인과 일곱 번째 인 사이에 7장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7장에서 6장 말미에서 던진 질문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에 대한 대답을 확실하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이다. 누구도 그 앞에서 견뎌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교회,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 그들은 그 앞에서 건짐을 받는다.하고 교회에게 힘과 용기와 격려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4장에서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일곱 재앙을 세상과 함께 겪어 내야 하기 때문에 때로 낙담하고 때로 절망에 빠지고 때로 힘에 부쳐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재앙의 중간 중간에 우리 교회의 신분과 영적인 실존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7장을 보면 7장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7장을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71절을 보면 그 뒤에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그 뒤에 라는 단어는 시간적인 순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이 본 환상의 순서입니다. 환상(幻想)의 순서가 꼭 시간적 순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왜 제가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은 이 구절을 굳이 설명을 해 드리는가하면 일부 세대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가지고 7장을 여섯 번째 인의 재앙 다음에 하느님께서 잠깐 쉬는 시간을 주시고 그 사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을 치신다고 주장을 하기 때문에 제가 이 부분을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묵시록은 시간적인 순서로 역사를 나열해 놓은 책이 아닙니다. 요한묵시록은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들을 대입해서 맞나 안 맞나를 풀어 보는 수수께끼 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수십 번 말씀 드렸습니다. 요한이 여섯 번째 인의 환상 후에 다른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묵시7:1) 1 그 뒤에 내가 보니 땅 네 모퉁이에 천사가 하나씩 서서 땅의 네 바람을 제지하여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네 천사가 붙들고 있는 네 바람이 무엇인가? 즈가리야 서로 한번 가보지요.

 

(즈가6:1-5) 1 또다시 고개를 들고 보니,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병거 네 대가 나오는데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세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네째 병거는 짙은 점박이 말들이 끌고 있었다. 4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5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 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

 

그 네 바람이 6장에서 공부한 네 말 탄자들입니다. 이 땅에 재앙을 선포하는 네 말 탄자들을 네 천사가 붙들고 있습니다. 왜 붙들고 있습니까? 3절 보세요.

 

(묵시7:3)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이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말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기 위해서 그 재앙을 선포하는 네 바람, 네 말 탄자들을 천사들이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시대에서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이 물 건, 이 가축, 이 노예는 내 것이다라는 표시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것들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보호 한다는 주인의 보호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이 사람들은 다 내 것이 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 한다그렇게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묵시9:4) 4 그것들은 땅에 있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쳐서는 안 되고 다만 하느님의 도장이 이마에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도장을 찍히는 자들은 모든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다는 것은 그 재앙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진공 상태로 보호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재앙을 함께 당하지만 그 재앙의 궁극적인 결과인 죽음으로 가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로 말미암아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도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그 재앙으로, 심판으로 죽어야 하는데 우리 대신 하느님의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고 나오실 때에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시지요? 죽음의 사자가 그 양의 피가 묻어있는 곳은 그냥 넘어 갑니다.(pass over) 그 집의 장자는 죽은 것으로 간주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장은 그런 것입니다. 그 도장을 받은 자들은 절대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묵시14:1) 1 그리고 나는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한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우리를 넘어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이 하느님의 도장이고 하느님의 보호하심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세상을 쓸어버릴 일곱 재앙을 설명해 주시면서 교회야, 내 아들딸들아, 너희들도 세상이 당할 재앙에 그대로 노출이 될 것이기 때문에 때때로 너희들의 삶이 고단하고 힘이 들 수가 있다. 그러나 너희는 절대 낙망(落望)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을 걸고 너희들을 지킬 것이다. 지금 그러한 상황들은 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참아 내거라하고 7장을 끼워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네 바람을 붙들고 있는 네 천사들에게 내 자녀들에게 도장을 찍을 때까지 그 바람을 절대 놓지 말라는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어디서부터 올라옵니까? 해 돋는 곳, 동쪽으로부터 올라옵니다. 유대 종교 사상에서 동쪽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나타내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도 동쪽에 지으셨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고 에제키엘서 43장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문을 통하여 들어 왔다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도 동쪽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르단강 서편에 있는 가나안 땅을 굳이 요르단 동편으로 가서 요단강을 쪼개고 그 강을 건너서 동쪽에서 들어가는 것은 다 그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한군데만 찾아보고 갈까요?

 

(여호수1:15) 15 너희 동족이 너희처럼 정착지를 얻게 될 때까지 함께 싸워 주어라. 그들도 너희와 마찬가지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하여야 한다. 그제야 너희는 너희의 차지가 된 땅, 곧 야훼의 종 모세에게서 너희가 받은 요르단강 건너편 해돋는 쪽에 있는 땅으로 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똑같은 단어가 나오지요? ‘해 돋는 쪽‘. 해 돋는 곳에서 올라온 그 천사는 하느님의 은혜의 소식을 전달하러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도장을 받게 되는가?

 

(묵시7:4) 4 그리고 내가 들은 바로는 도장을 받은 자들의 수효가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마에 도장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 파에서 나온 십사만 사천입니다. 이 구절도 많은 오해와 곡해를 불러일으킨 구절이지요? 하느님의 도장을 받는 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선택된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문자적 해석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5절부터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거명 하면서 각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뽑아서 도장을 받게 한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5절 이하에 열거되어 있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도장을 받는 사람들의 계수 장면은 민수기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 장면을 인용한 것입니다.

 

(민수1:1-3,45-46) 1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나온 그 이듬해 이월 일일, 야훼께서 시나이 광야의 만남의 장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을 그 갈래와 가문별로 나누어 모든 장정을 일일이 호명하여 그 수를 세어 가며 병적을 조사 하여라. 3 너는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스무 살 이상 되는 모든 장정을 부대별로 병적부에 올려라. 45 이렇게 이스라엘에서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스무 살 이상 되는 장정을 이스라엘 백성의 각 가문별로 모두 등록시키고 보니 46 등록된 장정의 수는 모두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이었다.

 

하느님께서 싸움에 나갈 만한 군사를 계수 하라고 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는 항상 이십 세 이상의 남자, 즉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나이의 남자들만을 계수 했습니다. 그렇게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장정이 6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장면을 인용해서 무언가를 웅변적으로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육십만을 십사만 사천으로 바꾸어서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조금 이상합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많이 다릅니다. 우선 5절 이하에 거명 된 열두 지파에는 단 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 대신에 요셉지파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레위 지파는 계수에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나 갈 수 없는 야훼를 섬기는 일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레위 지파도 들어 있습니다. 왜 이런 파격과 혼돈(混沌), 이러한 불규칙한 나열이 5절 이하에 도입이 되었는가? 한번 보자고요.

먼저 요한은 민수기의 계수 장면을 자신의 책에 인용해서, 그 도장을 받는 자들은 이 땅에서 전투를 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을 씀으로 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 질 것이라고언약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진짜 이렇게 하느님의 약속대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영적 이스라엘, 하느님의 교회가 하느님의 도장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하느님의 언약의 성취를 강조하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사를 계수 하던 민수기의 장면을 인용해서 그렇게 도장을 받은 하느님의 언약 백성들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군사로, 전투하는 자들로 그들의 인생을 경주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23 X 4입니다. 3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숫자입니다. 4는 동서남북 온 우주를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12라는 숫자는 삼위 일체 되신 하느님께서 온 우주 가운데 역사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 수입니다. 그런데 이 온 우주는 결국 무엇 때문에 존재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백성들 때문에 창조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온 우주에 역사 하셔서 하느님 자녀들의 자녀 됨을 만들어 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영원히 하느님과 있게 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하느님은 온 우주에 역사하고 계신것입니다. 이 온 우주는 바로 우리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들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12라는 숫자로 표현을 합니다.

12지파 12사도, 거룩한 새 예루살렘의 12문과 12 기초석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백성들인 교회를 상징하는 숫자들입니다. 그 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의 숫자를 곱해서 12X12=144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록 21장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새 예루살렘의 높이를 144규빗이라고 한 것이지요.

 

(묵시21:17) 17 또 그가 성벽을 재어 보았더니 사람의 자로 백 사십 사 척이었습니다. 이 자는 천사의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당시 고대시대에서 가장 큰 숫자였던 1,000을 곱해서 그 교회의 숫자가 아주 많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1000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들의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교회를 144,000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묵시록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나열하면서 일부러 단 지파를 빠트리고 요셉 지파와 레위 지파를 집어넣고 하는 구약의 열두 지파와 혼돈(混沌)이 되는 불규칙한 나열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장을 받게 되는 자들은 민족적 이스라엘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 바로 교회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왜 단지파가 빠졌는지, 왜 레위 지파가 들어갔는지, 왜 에브라임이 빠지고 요셉지파가 들어갔는지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마세요. 저도 그 부분을 밝혀 보겠다고 아주 많은 시간을 썼는데 결국 시간만 낭비했습니다.

 

그냥 요한이 이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불규칙한 나열을 한 것이라고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단지 구약의 표현들을 인용해서 그 구약의 표현들이 주었던 메시지만을 차용한 것뿐입니다. 당시의 독자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구약의 내용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한 것뿐입니다. 바로 이 내용이죠?

 

(로마9:6-8) 6 나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패로 돌아 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며 7 아브라함의 후예라 하여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사악의 혈통을 이은 자만이 네 자녀라 불리리라' 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8 이 말씀은 육정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하느님이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미 BC720년에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망()하면서 이스라엘의 지파는 사실상 다 뭉개졌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피가 섞여서 그냥 사마리아 인이라는 이름으로 뭉개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AD70년에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지파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12,000씩 뽑아서 하느님이 도장을 치신다는 것은 넌센스지요. 묵시록의 144,000은 영적(靈的) 이스라엘, 교회(敎會)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7장 서두에서 이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 그러나 하느님의 도장을 받아서 안전하게 보호받게 되는 교회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9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그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가 천상에 어떻게 완성이 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너희들 힘들겠지만 천상에 이미 완성이 되어 있는 너희의 이 실존을 보고 참고 인내하며 잘 견뎌하고 우리들의 천상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9절에 그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 이스라엘의 자손, 144,000명이 어떻게 묘사가 되어 있는지 보세요.

 

(묵시7:9) 9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44,000명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아무도 셀수없는 큰 무리라고 표현을 하지요? 아까 144 X 1,000에서 1,000이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숫자라고 했지요? 이렇게 144,000은 각() 나라와 민족과 백성 중에서 도장을 받은 아주 많은 무리, 교회(敎會)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44,000은 우리가 공부했다시피 이 땅에서의 전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9절 이하의 천상의 교회는 이미 거기를 통과하고 나온 자들입니다.

 

(묵시7:13-14)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나온 자들입니까? 큰 환난(患難)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come out of the great tribulation’ 거기서 쓰인 단어가 헬라어 에크입니다. 그 말은 ‘out from tribulation’이 아니라 ‘out of tribulation’이라는 뜻입니다. 환난을 겪지 않고 휴거된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환난을 겪었으나 하느님의 도장을 받아, 하느님께서 보호하심으로 거뜬히 그 환난을 통과해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묵시록 71절에서 8절까지에 나와 있는 도장을 받는 144,0009절부터 17절까지의 허다(許多)한 무리는 같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인 144,000이 도장을 받는 것은 재앙이 시작되기 이전입니다. 네 바람이 활동을 하기 전에 인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무리가 하느님의 존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는 장면은 재앙을 통과한 이후입니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78절까지와 9절 이하의 내용 사이에 요한묵시록 6장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우리는 이미 창세전에 도장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소위 일곱 재앙이라는 것을 통과하며 하느님을 배우고 우리에게 왜 구원이 필요했는지를 배우며 하느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져서 9절 이하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입성(入城)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처음과 끝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서의 교회의 삶은 힘들고 고단한 것입니다. 악한 세력들이 하느님을 대적해서 악을 양산하고 있고 그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신들을, 그리고 우주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도 그 옛 사람이었을 때의 습관, 경향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모든 악한 것들을 들어서 재앙으로 환난으로 사용하십니다. 결국 악한 세력들과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되고 파괴되고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그 악한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주는 재앙들을 똑같이 겪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히려 그 재앙이 우리의 신자 됨을 훈육하고 가르치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도장을 찍으셨고 우리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변할 수 없는 미래의 현실이 이미 완성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라가 9절 이하에서 봤잖아요. 영적인 실존. 그래서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로마 8:31-39) 31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33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안전(安全)합니다. 우리를 낙담(落膽)시키고 초라하게 보이게 하는 것들은 전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여정 동안 이 재앙의 시기를 통과하는 동안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많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우리를 낙담시키면 안 됩니다.

간암에 걸린 아빠를 위해 자신의 간을 떼어 준 중학생 소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빠를 위해 간을 잘라내기 위해 수술을 하고 회복을 하는데 너무 많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리더라는 것이죠. 아픈 건 어떻게 못 하겠더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곁에서 회복해 가고 있는 아빠를 보니까 배가 아프긴 아픈데 가슴은 기쁨으로 꽉 차더라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해 겪는 것들이 안 아프지 않습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는 아픔이기 때문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혼자 슬며시 웃을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묵시7:15-16)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으며 하느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옥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가리워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요,

 

15절에 보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밤낮 하느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분명 그 곳에는 밤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밤낮 하느님을 섬긴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영원히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장막을 치신 답니다. 우리를 품어 안으신다는 말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 들이 다 뭡니까? 일곱 재앙의 내용들이지요? 이 땅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만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낙담되고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세요.

지금 이 미칠 것 같은 현실은 잠시 스쳐 가는 나그네길일 뿐입니다. 이렇게 미칠 것 같은 죄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후면 9절 이하에 있는 다시는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함을 입지 않는 영원한 하느님의 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리고 견뎌 내십시오. 마침내 맨 발로 뛰어 나오시며 내 딸 왔느냐, 내 아들 왔느냐 하고 우리를 품에 안고 우리의 흘린 눈물을 닦아주실 우리 아버지를 만날 날이 곧 옵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묵시7:17) 17 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늘의 희망을 품은 자들은 이렇게 삽니다.

 

(에페4:30-32) 30 마지막 날에 여러분을 해방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보증해 주신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여 드리지 마십시오. 31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 버리십시오. 32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매일 매일 우리의 신분(身分)과 우리의 영적인 실존(實存)을 확인하고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사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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