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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령의 날 - 첫째 미사] 진복팔단(眞福八段) (마태5,1-12ㄴ)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02 조회수68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1월 2일 화요일

[위령의 날 첫째 미사] 진복팔단(眞福八段(마태5,1-12)

   

 

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욥기19,1.23-27)

욥이 말을 받았다. 23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화답송 시편 27(26),1.4.7과 8과 9.13-14(◎ 1ㄱ 또는 13)

◎ 주님은 나의 빛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나의 구원나 누구를 두려워하랴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주님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자비를 베푸시어 응답하소서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주님께 바라라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주님께 바라라

 

2독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로마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복음<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1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마음이 가난한 사람들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슬퍼하는 사람들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온유한 사람들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자비로운 사람들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평화를 이루는 사람들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11월 2일 위령의 날 제1독서 (욥19,1.23-27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5)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욥은 앞에서 자신의 사연이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23절, 24절) 자신의 사연과 무죄함이 후대에라도 전해져 입증되기를 갈망하였다.

이어지는 본절에서는 욥은 구원자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호해 주실 것이란 희망을 피력한다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극한적 고통에 처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욥의 심리적 상태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욥은 애타는 자신의 상황,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피력해 왔었다. 또한 누차 친구들의 말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친구들은 더욱 강도를 높여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실 하느님을 증인이요, 변호인, 재판관으로 청하면서, 그분이 자신의 말을 공정하게 증언하고,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의롭다고 판단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욥의 상황이나 심경등을 감안해서 이해할 때, 본절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 본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표현은 '구원자' 이다. 본절에서 '나의 구원자' 에 해당하는 '꼬알리'(goalli ; my Redeemer)는 '구속하다','친족으로서 행동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까알'(gaal)의 분사형에 1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 사용된 '까알'(gaal)은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민수35,12),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친족)의 소유지(기업)를 되사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레위25,25.26), 또는 친족이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등(룻기2,20)의 행위과 관련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욥의 억울함을 하느님께서 구원자가 되셔서 해결해 주시고, 그 진실성을 증언해 주실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욥이 극심한 고난과 혼란 가운데서도 구원자의 등장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 매우 놀라운 일이다.

즉 욥은 인간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구원자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천주 성자 제2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욥이 지금 자신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막연하게나마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등장하실 것을 염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의미는 후반절의 '그분께서는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가 ~서시리라' 에 해당하는 '야쿰'(yaqum)은 '서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쿰'(qum)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일어선다'는 것은 특정 공동체에서 자기 의사 표명을 위해, 또 법정에서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욥은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서실 것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술을 함에 있어, 욥은 '나는 알고 있다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알고 있다네'에 해당하는 '야다으'(yadah)의 완료형에 1인칭 주격 접미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사용된 '야다으' 동사는 주로 남녀가 동침하는 것과 관련해서(창세4,17,25), 실제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생생하게 현장에 참관해서 듣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가장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확실한 앎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욥이 본문에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구원자로서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원하는 바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일면 자신의 무고함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확증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6)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본절은 욥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 앞에 설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 가운데 '몸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라진다.

이에 해당하는 '우밉베사리'(umibbesari; 내 몸으로; yet in my flesh)는 접속사 '와우'(wau)에 '~로부터'(from)란 의미를 지닌 전치사 '민'(min), 그리고 '몸'(살) 을 의미하는 명사 '빠사르'(basar; flesh)에 1인칭 소유격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표현에 대해 첫번째 해석은 전치사 '민' 을 분리의 의미로 보고, 욥이 죽은 후에 육체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느님을 뵈올 것이라는 견해이다.

또 다른 해석 '민'을 출발의 의미로 보아,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하느님을 뵈올 것이란 견해이다.

이것은 욥이 죽기전에 지금의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목도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전자의 의미를 취하며, '민'(min)을 분리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본절의 상반절인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라는 표현과 어울리며, 욥이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것을 확신한 사실이 본서 전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감안할 때에도 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앞서 9장 32절에서 욥은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것에 대하여 회의와 절망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분은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 없다네." (욥9,32)

 

따라서 본절인 19장 26절은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앞선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인식할 수 만은 없다.

이것은 두 본문 사이에 그 전제, 즉 욥이 가정하는 상황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9장 32절은 육체가운데 있는 현 상태, 즉 이승에서는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과 만나 쟁론할 수 없다는 의미인 반면, 본절은 자신의 가죽이 썩은 후, 곧 내세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이것은 결코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욥은 특별 계시가 완성된 신약 시대의 백성들처럼, 죽음 이후 인간은 하느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천국과 연옥과 지옥으로 가며, 종국에는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등과 같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욥기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욥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영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정도의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령의 날] 오늘은 3대의 독서와 복음을 하나로

 

*첫째미사

(독서) 로마5,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 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 예수님의 피로 죄인이 거저 의롭게 되는 것, 그것이 기쁜 소식, 복음이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의 피로 죄가 다 씻겨 졌기에 그 길만이 구원의 진리라 말하면 박해를 받는다.

 

(복음)마태 5,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아멘.

 

*둘째미사

(독서) 5, 17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예수)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 그 말씀을 믿지 못하는~

 

(복음) 마태11,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려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사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오라 하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죄를 대속 하신 내 십자가였던 것, 그 진실을 배워 깨닫고 믿었을 때, 마음의 쉼(안식)을 살게 된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가신 것이기에, 그 믿음의 결과가 내가 지금 지고 있는 무거운 짐, 곧 자신의 의로움을 위한 종교행위를 내려놓는, 否認하는 그 버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째미사

(독서) 로마6,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그 구원을 얻기 위해 세상적인 내가 죽는 것, 그렇게 십자가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모든 죄가 없어져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요한12,7참조)

 

(복음) 마태25,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는 구원, 그 하느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신앙인, 어리석은 처녀들인 것이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교회)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10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 오늘의 모든 말씀의 결론은 “깨어 있어라”이다. 곧 말씀을 늘 준비하라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그 준비는 우리의 머리로, 지혜로 하면 안된다. 하느님의 “그 날과 그 시간”을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고 따라갈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을 청하고 구해서 그분께 의탁하는 그것이 참 깨어있음이다.(말씀, 생수는 또한 성령이다. 요한7,39) 그래서 어리석은, 헛된, 그 거짓말에 속지않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 하느님의 약속, 그 십자가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 성령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기억(기도)하는 ‘그 되새기는 신앙을 살라’ 하시는 것이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마태11,29)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아멘.!!!

 



 

 11월 2일 위령의 날 첫미사 복음 (마태5,1-12ㄴ)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1~12)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은 10절에 나오는 여덟번 째 행복의 보충 내용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3절~10절까지의 전체 팔복(八福)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이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 때문에'에 해당하는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heneken dikaiosynes; for righteousness)와 비교할 때, '~때문에', '~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니는 '헤네켄'(heneken; for)은 동일하고, 다만 '의로움'(디카이오쉬네스;dikaiosynes)이 '나'(에무; emou; me)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가 있다.

 

사실 마태오 복음 5장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로움'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righteousness)는 윤리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인 의로움이다.

즉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은 6절보다 종교적인 측면이 더 강한 의로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서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삶은 바로 '의로움', '의'(義)의 전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3~10절까지 나오는 팔복(八福)의 서술에서는 모두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토이'(autoi; they)인 3인칭 남성 복수 주격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는 '너희'에 해당하는 '휘마스' (hymas; you)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오 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 즉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는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자로 취급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또한 로마 지배 세력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반국가 사범이란 죄목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일반 믿지 않는 대중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 때문에 질시받고 부도덕한 자들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태오 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할 수 밖에 없기에, 이제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 사용해서 이러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chairete; rejoice)의 원형 '카이로'(chairo)는 '기뻐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 be gla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는 '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agallo)와 '뛰다', '솟아나다'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hall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을 뜻한다.

 

특히 이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 지금 극한 고난의 상황에 있어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는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토스'(misthos; reward)는 '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박해를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기준에 다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마태20,1~16; 루카17,7~10).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상이 크다'는 약속에서 '크다'에 해당하는 '폴리스'(polys; great)는 크기가 크다(large)는 뜻이 아니라 양이 아주 많은 (much) 것을 뜻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상의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믿는 이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박해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 때문에'(마태5,11)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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