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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루카15,1-1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04 조회수73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1월 4일 목요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루카15,1-10)

 

 

 

1독서<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14,7-12)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12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27(26),1.4.13-14(◎ 13)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 주님은 나의 빛나의 구원나 누구를 두려워하랴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주님께 바라라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주님께 바라라

 

복음<하늘에서는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1-10)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이와 같이 하늘에서는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제31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14,7-12)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14,7)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14,10.12) 오늘 로마서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른  말씀은 필리피 서간 1장 20절이하 였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될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필1,20-24)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이 없다. 마치 박해 시대 때 우리 믿음의 선조들처럼, 고통과 박해 속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고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을 찬미하며,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천국은 우리의 본향, 우리가 본래 있던 곳이므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있으면서도,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실재를 체험하고, 주님께서 나의 삶을 항상 동행함을 느낄 때는 빨리 주님께 가고 싶다.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공동선익을 위해, 영혼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복음을 전하고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니까 이 땅에 사는 것이지, 정말로 주님 대전에 빨리 가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사도 바오로가 <살든지 죽든지>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것은 이미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뜻이다. 

<주님 안>에서는 삶(현세적 삶)이 죽음(영신적 죽음)이요, 죽음(이땅에서의 죽음)이 삶(영신적 삶)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주님 안에서는 삶과 죽음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말씀을 묵상하면, 요한 복음 12장의 예수님 말씀과 이순신 장군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4-25)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는 말이 떠오른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산다.' 뜻이다. 이 말은 중국의 전국시대 병서인 오기병법(吳起兵法)에 나오는 말이다. "대체로 병사에게는 전쟁터가 한번의 실수로 죽음의 땅이 된다. 죽기로써 싸우면 반드시 살고, 요행히 살려고 하면 죽는다."(凡兵戰之場  立屍之地 必死卽生 幸生卽死)

 

이순신 장군은 오기병법의 말을 인용하여, 사는 것과 죽음을 하나로 생각하는 임전훈(臨戰訓)을 삼고, 병사들을 직접 지휘하고, 일기(정유년 9월 15일자)에도 기록해 두었다. 

그날 일기를 요약해 보면,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모두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라고 적고 있다.  

 

특별히 교회력의 마지막 달을 위령성월로 보내면서, 죽음과 심판을 묵상하는 시기이기에 오늘 말씀이 채택된 것 같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다. 

육신은 물질이라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비물질적 실체라 물리적 파괴나 화학적 분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불사불멸하여, 이 지상에서의 자유를 시험하는 기간 동안 저지른 죄를 심판받고, 천국, 연옥, 지옥이 결정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오늘 특별히 강하게 와 닿는다. 영육이 분리되면, 영혼은 하느님께로부터 빛을 받아 자기 스스로 자기 죄를 이야기하고 인정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심판이라 한다. 

현세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세가 결정되는 종말론적인 삶(eschatological life; 이미 하느님의 통치가 이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삶;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세에 개방되어 있는 현세를 지금 이자리에서(now & here)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5,1-10)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2)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정한 자 혹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로 여겨지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애초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한결같이 거부하므로(루카14,18~20), 그들은 단 한 명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루카14,24).

 

그래서 대신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 속에서 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식사를 즐기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랑하는 율법과 거리가 먼 이들을 받아들이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신 이유는 당신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선취하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루카14장). 

 

여기서 '받아들이고'로 번역된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 receives; welcomes)의 원형 '프로스데코마이'(prosdechomai) 어떤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며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로마16,2; 필리2,29). 즉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는 도움을 얻거나 존경하기 때문에 맞아들이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실 때, 마치 유대인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하듯 하신 것이다. 경멸받으며 기피되던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당시의 사람들,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루카7,34). 

 

유대인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같은 부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람들 중에서도 경멸받는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필리2,7). 

하지만 잃어버린 자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이 초청을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들이 분명하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카 복음 15장 6절과 10절이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 '잃은 은전 한 닢의 비유'의 결론이 되어서, 잃어버린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런 기쁨은 한 명의 죄인이라도 찾고 찾으시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발견할 때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 돌아온 죄인들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반드시 놀라운 기쁨이 생겨난다. 루카 복음 15장 10절의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표현은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속한 천사들도 기뻐할 정도로 너무도 중요한 사건임을 나타낸다. 

 

 

>12< 되찾은 양의 비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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