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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독서,복음 (역주,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06 조회수793 추천수0 반대(0) 신고

평신도 주일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면서, 평신도를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1968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지금은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의 결성과 더불어 해마다 대림 제1주일을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사명을 거듭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뒤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 오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중 마지막 전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면서 2017년부터 한 주 앞당겨 지내고 있다.

 

 

 

 

 

1독서<과부는 밀가루로 작은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다.>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10-16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10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엘리야 예언자는 사렙타의 과부에게 물과 빵을 청하고는, 그 여자의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2독서<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히브리서 역주(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성소)의 모조품에 불과한,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면전에 나타나시려는 것입니다.

25 그리하여 그분은 대제관이 다른 피를 가지고 매년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지 않으십니다.

26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세상 시초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시대의 종말인 지금 자신의 희생을 통해 적을 없애기 위하여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그리고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처럼

28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하여 한 번 봉헌되셨고, 두 번째는 구원을 위하여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죄(와 상관) 없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2독서 주해

24

대제관은 자신과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참된 성소인 하늘에 들어가셨고, 지금도 하느님을 직접 대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다.

 

25

대제관은 해마다 대속죄의 날에 짐승의 피로 희생제사를 바치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참된 대제관인 그리스도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 곧 단 한 번의 십자가 제사로 천상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분의 희생은 한 번 이루어졌지만 영원한 가치를 갖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은 한 번이자 영원한 가치를 갖는 대속적 행위였다.

 

27

27-28절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절대적 가치를 사람의 죽음과 비교하여 더욱 확실히 증명한다. 사람은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음도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죽음을 통한 속죄의 효과는 영속한다. 그분이 두 번째로 오시는 것은 사실이나 그때는 속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룩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다.

 

28

예수께서는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야훼의 종 노래에 이미 예고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고 희생되심으로써 속죄하는 야훼의 종이 되셨다.

 

 

 

 

 

복음<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마르코복음 역주(12,38-44)

율사들을 조심하라

38 그리고 그분은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율사들을 조십하시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기다란 예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

39 회당에서도 높은 좌석, 잔치에세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40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또한 돋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41

그리고 예수께서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서 군중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양을 보고 계셨다. 여러 부자들이 많이 넣고 있었다.

42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는 렙톤 두 닢을 넣었다. 이것은 과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헌금함에 넣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넣었습니다.

44 사실 모두 그 넘치는 가운데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그 구차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모두, 그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주해

38

38-29절의 변체가 어록에 전해오는데, 루카11.43이 가장 오래된 전승일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율사들을 조심하라는 훈시가 아니고 바리사이들을 통박하신 불행선언이다. “불행하도다. 너희 바리사이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좍석을 차지하는 것,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즐기니”(루카11.43).

 

이스라엘 남자들은 누구나 축일에 두루마기 비슷한 예복을 입었는데,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예복은 한결 길었던 것 같다. 또한 남자들은 출애 13.1-16‘ 신명6.4-9: 11,13-21를 적어 담은, 작은 성냥갑 비슷한 소위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고 다녔다. 그리고 겉옷 자락 내 곳에 흰 실과 푸른 실로 꼬아 만든 술을 달고 다녔는데, 이른바 옻단 술이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남들보다 성구갑도 큼직하게 하고 옻단술도 기다랗게 만들었다고 한다(마태23.5).

 

율사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선생님(랍비)”또는 아버님(아빠)”이라 부르며 인사했다.

 

39

회당에서 신도들은 전면에 있는 성경 보관소를 향해 앉았고 율사들은 보관소를 등지고 신도들을 향해 앉았다. 그리고 율사가 잔칫집에 오면 매우 영광스럽게 여겨 상좌에 모셨다(루카 14,7-10 참조).

 

40

과부와 고아를 학대하지 말라는 법령을 어긴 지도자들을 예언자들은 통박했다(이사 1.23;10.2).

 

열심한 체하려고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에서 기도하지 말라(마태 6.5-6). 억지로라도 하느님을 움직이려고 이방인들처럼 수다스럽게 기도하지 말라(6,6-8)고 하신 기도훈시 참조.

 

41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모이는 여자 구역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에 헌금함 열세 개가 있었다.

 

42

렙톤은 그리스 돈 가운데 최소단위 동전으로 그리스 은전 드라그마의 128분의 1이다. 마르코는 그리스 돈을 로마 돈으로 환산하여 두 렙톤은 로마 동전 한 과드란스와 같은 액수라고 한다.

 

43

28-29절에는 다섯째 전승요소가 적혀 있다. “아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로 시작된다. 유다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남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아멘이라 응답한다. 혹은 아멘 아멘(요한 복음)이라 하시는 때가 있다. 그분의 독창적 어법에는 당신의 말씀이야말로 참되다는 확신이 번뜩인다. 그렇다고 해서 아멘으로 시작되는 말씀을 죄다 예수 친히 발설하신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신도들이 자기네가 만든 말을 예수님의 말씀인 양 내세우면서 그 앞에다 아멘을 덧붙인 경우도 있다. “아멘. 나는 ... 말합니다란 표현은 마르코복음에 열세 번 나온다.

 

44

생활비는 그 날의 식비라고 보면 무난할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검찰청에 근무할때에 "예.예"하는 예를 두번씩 말하지 말라는 교육이 있었습니다.

"아멘, 아멘".   그런데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지금도 사람들과 대화나 전화를 받을 때면 "예.예"하고 말하는

습관이 없어지질 않습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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