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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 목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독서,복음(역주,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10 조회수1,054 추천수0 반대(0) 신고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성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파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의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1독서<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체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다.>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7,22-8.1

22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결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23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24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25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6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체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7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8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30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8.1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는 세상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고 한다.

 

 

 

 

루가복음 역주(17,20-25)

종말 교훈

2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바리사이들에게서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알아채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21 또한 보라, 여기 있다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보시오. 실상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22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인자의 날들 가운데 하루라도 보고 싶어할 날들이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입니다.

23 ‘보라. 저기 있다’(혹은) ‘보라, 여기 있다고 여러분에게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떠나가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시오.

24 사실 번개가 번쩍하면 하늘 이 끝에서 하늘 저 끝까지 비치는 것처럼 인자도 (그의 날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25 그렇지만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주해

종말 교훈

70년경에 마르코는 종말에 관한 전승들을 수집하여 나름대로 종말론(13)을 엮었다. 그보다 10~20년 앞서 어룩작가도 종말 구전들을 모아 자신의 종말론을 전개했다. 마태오는 어록의 종말론을 갈기갈기 찢어 흩어서 마르 13장과 합하여 24장을 엮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루카는 어록의 종말론을 17,20-37에 마르 13장을 21장에 각각 옮겼다. 루카가 어록의 종말론을 옮겨쓰면서 군데군데 가필했는데, 아마도 20.21.22.25.31.32.37ㄱ절이 가필일 것이다.

 

가필한 부분을 삭제하면 어록의 종말론을 복구할 수 있는데, 그 형태는 대체로 이러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알아채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보라, 여기 있다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20-21ㄱ절).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고 여러분에게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떠나가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시오, 사실 번개가 번쩍하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비치는 것처럼 인자도 그의 날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23-24).

 

또한 노아의 날들에 된 것처럼 인자의 날들에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인자가 계시되는 날에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26-30). 제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한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34-35).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입니다(37ㄴ절).

 

어록의 종말론에 들어 있는 종말사상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 나라는 곧 도래한다. 인자는 곧 내림한다. 종말은 임박했다. - 종말은 예기치 못한 때에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시기는 미리 알아책수 없다. 또 종말사건이 일어날 장소도 미리 알아챌수 없다. 왜냐하면 종말에 하느님과 인자는 어느 한 곳에만 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20-21. 23) 시간적으로 예상할 수 없고 공간적으로 국한할 수 없는 종말론은 마치 번개와 같다 하겠다(24).- 이러한 종말에 대비하여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만 구원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 노아와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작죄하는 삶을 꾸려 간다면 멸망을 당할 것이다(26-30).

 

이제 루카의 종말사상을 요약할 차례다. 어록작가는 종말이 임박한 것으로 여긴 데 반해서 루카는 종말이 도래하기 전에 한동안 교회의 역사가 계속될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교회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에 갑자기 종말이 닥칠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루카는 갑자기 닥칠 종말에 대비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 그러면서 루카는 종말의 때를 점치는 따위 묵시문학적 호기심을 일축했다. 또한 종말에 하느님 나라와 인자가 오실 곳을 점치는 따위 묵시문학적 호기심도 일축했다. 앞서 루카는 종말에 구원받을 사람의 수효를 계산하는 묵시문학적 호기심도 일축한 바 있다(13.23).

 

20

루카가 앞에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겠습니까?”라는 질문을 꾸민 것처럼, 여기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도 꾸몇을 것이다.

 

알아채게는 직역하면 관찰과 함께”. 묵시문학계에서는 종말의 시기를 미리 알아채는 것. 종말에 하느님과 인자가 오실 장소를 정확히 알아채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21

지금의 문맥에 따라 풀이하면,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도래 시간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 도래 장소에 관해 답변하시는데, 이는 매우 어색하다. 루카가 20ㄱ절을 가필한 까닭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라는 말씀은 그 나라가 시간적으로 이미 도래했다는 뜻이다. 우선 문체상으로 보시오. 실상은 신약성서 중 2고린 7.11을 제외하면 오직 루카의 작품들에만 여섯 번 나온다. 그리고 내용상으로 볼 때 21ㄴ절은 구원의 현재성을 역설하는데, 이는 루카의 지론이기도 하다.

 

22

지금의 문맥에 따라 22-23절을 풀이하면, 제자들이 인자의 날들”. 곧 인자가 내림하여 구원하실 날들을 보기 전에 가짜 인자가 와서 그들을 현혹케 하리라는 뜻이다. 종말이 도래하기에 앞서 반()그리스도 또는 가()그리스도가 출현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22절은 루카의 가필이겠다. 우선 그리고 ...향하여 말씀하셨다는 루카의 전형적인 문체다. 또한 날들 가운데 하루는 신약성서 중 오직 루카복음에만 네 차례 있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날들이 오다또는 그와 유사한 표현이 루카복음에 흔하다.

 

어록에서는 20-21ㄱ절과 23-24절이 직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어록의 구절들을 풀이하면, 하느님 나라와 인자는 여기 또는 저기 어느 한 곳에 나타나지 않고 마치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세상 어디에나 임하신다는 뜻이리라.

 

25

25절은 루카가 9.22(=마르 8.31)를 거의 그대로 옮기다시피 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록에는 인자가 고난을 겪는다는 말이 도무지 없다.

 

 

 

 <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61,1-3ㄹ)와 복음(마태 25,31-40)을 봉독할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생질이 내년 봄에 결혼한다고 하는데 나는 무엇을 해 줄 것이 없다. 돈이 없어서 꾸어서라도결혼식때는 다만 얼마라도 줄 마음은 있으나 변제할 그러할 돈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이런 것들에 별관심이 없어서인지, 그러나 새가정을 꾸미며 살려는 생질에게 여러 궁금증이나 할말을 해주어야 겠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다른 여동생과 사소한 언성이 높은 말이 오고갔다. 생질의 남자가 돈이 없어서

아파트는 못얻고 사원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한다고 하면서 좋아하길래 그게 다 좋은 것 만은 아니야. 오히려 전세를 얻어서 조그만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사원아파트에서 재미를 본다면 아주 그곳에 머물러버리기 싶상이야, 그런데 이것도 자기 집이 아니기 때문에 집없이 살다가 남편이 인사이동을 해봐.”

 

그랬더니 여동생은 언성을 높이며 오빠가 결혼이나 해봤어? 해봤냐구.” 이는 자기는 결혼을 했으니 자기보다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군대의 비오큐의 삶도 보아왔고, 공무원시절에는 공무원만 사는 집에서 생활도 해봤고, 고시촌에서도 살아봤고, 다른 사람의 집에서 전세들어 살았도 보았으니까. 내딴에는 다 알아. 그놈의 돈이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는 것, 이와같은데 여동생은 나하고 같이 하느님 나라에 있다고 볼 수 있나요?

 

나의 지론은 가난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한다고 보는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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