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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30. 아마츠야의 유다 통치 / 북 이스라엘의 멸망[1] / 2열왕기[3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11 조회수722 추천수2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0. 아마츠야의 유다 통치(2열왕 14,11-22; 2역대 25,1-4.17-24 )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하즈의 아들 여호아스 제이년에 유다 임금 요아스의 아들 아마츠야가 임금이 되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기원전 811-782). 그의 어머니 이름은 여호아띤인데 예루살렘 출신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조상 다윗만큼은 못하였지만, 아버지 요아스가 하던 그대로 주님 눈에 드는 옳은 일들을 하였다.

 

그렇게 그는 여전히 산당들은 없애지 않아, 백성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웠다. 그는 자기 손에서 왕권이 튼튼해지자 부왕을 시해한 신하들을 대부분 쳐 죽였다(12,21-22 참조). 그러나 그 시해자들의 자손들은 모세의 율법서에 쓰인 대로 죽이지 않았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가 아들 때문에 처형되어서는 안 되고, 아들도 아버지 때문에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죄 때문에 처형되어야 한다.”(신명 24,16 참조)고 명령하셨다.

 

아마츠야는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군사 일만을 쳐 죽이고는, 전투 끝에 셀라를 점령하여 그곳의 이름을 욕트엘이라 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불린다. 이 골짜기는 소금 바다로 일컬어지는 사해 남쪽에서 아카바 해협까지 펼쳐진(2사무 8,13 참조) 오늘의 아카바를 가리킨다. 그리고 셀라는 바위라는 뜻으로 나바태아인들의 수도 페트라를 가리킬 수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이렇게 이름마저 욕트엘로 바꾸는 것은 그 주인이 바뀜을 뜻한다. 아마츠야는 이 성읍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그곳이 이제부터는 유다의 성읍임을 명확히 한다(여호 15,38 참조).

 

그 무렵에 아마츠야가 여호아하즈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런 말을 전했다. “, 우리 한번 겨루어 보자!” 그러나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유다 임금 아마츠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대답하였다. “레바논의 엉겅퀴가 레바논의 향백나무에게 그대의 딸을 내 아들에게 아내로 주오.’ 하고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레바논의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엉겅퀴를 밟아 버렸다. 그대는 에돔을 쳐부수었다고 마음이 우쭐해져 오만하게 구는데, 집에나 머물러 있어라. 어찌하여 재앙을 일으켜 그대는 물론 유다와 함께 쓰러지려 하는가?”

 

그러나 아마츠야가 듣지 않자, 여호아스 임금은 올라가 유다의 벳 세메스에서 유다 임금 아마츠야와 겨루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유다군은 이스라엘군에게 패배하여 저마다 모두 자기 천막 또는 제 고향으로 도망쳐갔다.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아하즈야의 손자이며 요아스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마츠야를 벳 세메스에서 사로잡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에프라임 성문에서 모퉁이 성문까지, 예루살렘 성벽의 사백 암마를 헐었다.

 

그는 이렇게 주님의 집과 왕궁 창고에 있는 금과 은과 기물을 모조리 빼앗고, 인질까지 잡아 사마리아로 당당하게 돌아갔다. 여호아스가 한 나머지 행적과 그의 무용, 그리고 그가 유다 임금 아마츠야와 한 전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다. 여호아스는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사마리아에 묻히고, 그의 아들 예로보암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유다 임금 요아스의 아들 아마츠야는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하즈의 아들 여호아스가 죽은 뒤에도 장장 열다섯 해를 더 살았으니, 예순 살에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다. 아마츠야의 나머지 행적은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다 쓰여 있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 그를 거슬러 모반이 일어났다. 그래서 결국은 유다 임금 아마츠야가 라키스로 도망쳤지만, 모반자들은 그의 뒤를 쫓아 라키스까지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그를 죽였다. 라키스는 가자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 곧 오늘의 텔 에드 두웨이르 도중에 위치해 있는 요새이다. 이 성읍은 처음에 아시리아에게, 나중에는 바빌론에게 점령당하였다. 유다 임금에 대한 음모는 다윗 왕조를 끝장나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마츠야를 말에 싣고 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묻었다. 유다의 모든 백성이 나이 열여섯 살인 아자르야를 데려다가, 자기 아버지 아마츠야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웠다. 아마츠야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든 뒤에, 아자르야는 엘랏을 재건하여 유다에 다시 복귀시켰다. 이 엘랏 항구는 외국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이다. 따라서 이 항구의 점령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엘랏은 아하즈 시대 때 다시 빼앗긴다(16,6).

 

예언자 엘리사가 죽은 후, 유다 임금 요아스의 아들 아마츠야 제십오년에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이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마흔한 해 동안 다스렸다(기원전 787-747). 그는 예후 왕조의 4대 임금이다.[계속]

 

[참조] : 이어서 ‘31. 예로보암 이세의 이스라엘 통치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여호아띤,아마츠야,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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