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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 (루카19,41-4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18 조회수73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1월 18일 목요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 (루카19,41-44)

 

 

1독서<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1마카베2,15-29)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화답송 시편 50(49),1-2.5-6.14-15(◎ 23)

◎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하느님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네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온 땅을 부르시네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에서하느님은 찬란히 빛나시네

○ 내 앞에 모여라나에게 충실한 자들아제사로 나와 계약을 맺은 자들아!” 하늘이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네하느님그분이 심판자이시네

○ 하느님에게 찬양 제물을 바치고지극히 높은 분에게 너의 서원을 채워라불행한 날에 나를 불러라나는 너를 구해 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복음<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19,41-44)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1마카2,15-29) 

 

마카베오기 상권은 1-2장이 입문이라고 이미 밝혔다.

입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후계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에피파네스라는 신성모독적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1장)와 이에 항거하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다섯 아들(요한,시몬,유다,엘아자르,요나탄)의 반란을 소개한다.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성읍과 집안에서 존경받는 신분인 마타티아스의 배교 행위가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왕명을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임금의 벗이 될 뿐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리게 될 거라고 유혹한다(17-18절).

 

이에 대해 마타티아스는, 임금의 왕국에서 모두가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자신과 아들들과 형제들은 한데 뭉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계약에 충실하고, 결코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19-21절).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22절) 

 

말하자면, 야훼 유일신 신앙을 따라 정도를 걷겠다고 의지를 드러낸다.

이교도의 것을 섞어서 절뚝거리는, 양다리 걸치는 혼합 종교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떤 남자가 나와서 배교 행위로 이교도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는 일을 보게 된다.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고,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라 그를 쳐 죽이고, 이교도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제단도 헐어 버린다(25절).


마치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 것이다(민수25,1-18).


"피느하스가 일어서서 법대로 다스리자 재앙이 멈추었으니 이것이 그에게 세세에 영원히 의로움으로 셈해졌다.'(시편106,30-31)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말한다.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 나서시오."(27절)

 

예레 34장 18절에 나오지만, 유다인들은 A와 B가 계약(berit:베릿)을 맺을때(karat: 맺다-직역하면,자르다), 송아지를 한 마리 가져다가 반을 자르고(죽이고), 그 잘라진 틈으로 A와 B가 지나간다.

계약을 어기면, 그 송아지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계약이란 피(생명)로 맺는 것이다.

물질적인 상행위로서의 contract 이 아니라 covenant 이다.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피(생명/인격)를 나누는 교환 행위를 말한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런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맺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했으나, 피가 오고 간 것이다.

 

그리고 그 계약의 산물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십계명이고 율법인 것이다.

우리가 계명과 율법을 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피(생명/목숨/인격)를 뿌려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계약의 당사자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몸도 마음도 갈라서서는 안된다.

다른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다른 짓을 해서도 안된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몸도 마음도 갈라서서는 안된다. 

충성해야 한다.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뿌려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도 마찬가지다.

구약의 백성이 계약의 산물인 계명을 어겼을 경우, 육신도 죽고,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계명을 어긴 육을 가진 인간들이 모두 영육간에 죽어야 했기에,  구원받을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없는 예수님이 아담으로부터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 까지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죄 지은 인간들이 더 이상 육신이 죽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동시에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고, 영혼 생명의 단절,  즉 은총이 끊어지지만, 다시 회복되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다시 일치와 성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복음이다. 무상의 선물이다.

옛 계약(구약)과 새로운 계약(신약)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선물인 성령을 모시기에 합당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성전에서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실 때와 성전 밖에서의 삶이 일치하는가?

가정과 사회와 직장에서 어떻게 죄와 죄의 기회를 단호히 끊고 거부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마타티아스의 율법에 대한 열정, 계약을 지지하고 충성하는 모습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하느님의 평화를 누려야 할 예루살렘이, 제사와 윤리 그 율법으로 사람의 뜻을 위한 도성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신다~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는 평화다. 그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그리스도 이시니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에페2,14)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속죄제물)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요한14,27)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대속 으로 죽으시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는 죄의 용서, 자유, 구원의 진리로 쉼, 안식(7),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규정과 교리에 의한 사람의 희생과 노력, 그 열심히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그 하늘의 평화가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계속 거부한다는 의미다.

 

(예레 6,6-16) 6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무를 베어 내고 예루살렘을 칠 공격 축대를 쌓아 올려라. 예루살렘이야말로 벌을 받아야 할 도성으로 그 안에 온통 *억압이 자리 잡고 있다.

= 하느님의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곳이다.

 

8 예루살렘아, 교훈(진리)을 받아들여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와 갈라서고 내가 너를 폐허로 만들어 인적 없는 땅이 되게 하리라.” 10ㄱ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알아듣도록 경고해야 합니까? 그들의 귀는 *할례(육의죽음)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 사람의 지혜, 뜻으로 듣는 그 귀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0ㄷ이제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웃음 거리가 되고 그들은 그 말씀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3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 예언자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짓을 행하고 있다.

=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계명인 냥 가르치는 그 거짓이다.(마르7,7~!9참조)

 

14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죄의식)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면서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한다.

= 사람의 계명과 종교 행위, 예식으로는 죄로 인한 상처, 곧 계속되는 미움, 죄 의식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하늘의 안식,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이시다.

 

15 그들은 역겨운 짓을 저질렀으니 부끄러워해야 하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얼굴을 붉힐 줄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쓰러지는 자들 가운데에서 쓰러지고 내가 그들을 징벌할 때 넘어지리라. 주님이 말한다. 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갈림길에 서서 살펴보고 *옛길을 물어보아라. 좋은 길이 어디냐고 물어 그 길을 걷고 너희 영혼이 *쉴 곳을 찾아라. 그러나 그들은‘그 길을 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찾아오신 때, 이미 찾아 오셨었다는 말씀이다. 언제?-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그 죄를 범했을 때이다. ‘아담이 죄를 짓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스스로 만들어 입은 그 옷은 죄를 덮을 수가 *없다~

 

(창세3,21)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가죽 옷, 아담의 죄를 덮어, 용서 하시려고 찾아오셔서 어린 숫 양을 죽이시고 그 죽음이 남긴 가죽 옷으로 만들어 입히셨다. 그 후에, 세상의 화려함과 큰 힘을 가진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그의 민족을 찾아가셨다.

 

(탈출3,7-8)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세상)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 그러나 이집트에서 구출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그 이민족의 풍습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좋아 보여 받아들이고 따랐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震怒)를 산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시련을 겪게 하시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부르짖으면 하느님께서 찾아 가셔서 판관들을 세워 그들을 그 시련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그러나 살만하면 또 이민족의 풍습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 하느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또 시련을 겪게 되고, 하느님은 또 그들을 찾아 가시고~ 

판관기는 전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죄와 하느님의 무한하신 용서, 그 반복의 이야기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끝까지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욕망을 고집하며 하느님의 말씀(뜻)을 따르지 않고 버린다. 그래서 아담을 구했던 어린 숫 양,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을 도왔던 모 세, 그리고 가나안의 판관들, 그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당신의 아들을, 그들의 끝없는 죄의 속죄 제물로 보내신다.

하늘의 쉼, 안식(7),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세상 모든 죄인(짐승)들의 구원(생명)의 양식으로 보내신 것이다.

 

(루가2,12) 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당신의 몸으로 지키시려 오신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살지 않는 그 하느님의 뜻을 버리는, 대적하는 죄,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들의 죄로 죽으시러 오신 것이다.

그것이 창조 이전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약속)이셨고 뜻 이였다.(에페1,4~) 그 뜻에 순명하신 어린양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그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길이 구원, 생명의 진리인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두루마리(성경)속에 일곱 번 봉인된, 곧 감추어진 일곱, 그 안식을 주는 진리를 깨닫고, 알 수 있도록, 열고 들여다 볼 수 있으신 분이 예수님 뿐이시라는 것이다.

(묵시5,1-9)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진리)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성경)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안식)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예수)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 인간들은 그 진리의 쉼, 안식이신 예수님을 모르기에 그분의 길이 어리석어 보인다.

 

(1코린1,23-24)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그러니 인간의 지혜, 계명으로 똑똑하다, 의롭다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찾아 가셨듯이, 오늘 죄인인 자신들을 찾아오신 구원자를 못 알아본다. 사람의 자기 의로움으로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들이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하신다.(1요한1,10)

인간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열심한 그 의로움으로 하늘에 오르려는 그것이 죄임을 모르기에~(창세11,1-9 로마9,30- 10,4참조)

그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구원의 하느님, 곧 자신의 죄 때문에 찾아오신 구원의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예루살렘, 그 안에 들어있는 내가 부서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는 전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된다.(묵시1,8참조)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히브4,1)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 주님! 당신의 일곱영,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시련의 사건들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뜻, 욕망을 위한 신앙에서 돌아서 하느님의 약속(생명)을 얻게하소서 ~아멘!!!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9,41-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1~42)

 

루카 복음 19장 41~44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 중에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흥분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가까운 장래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고 우시며 애가를 부르신다.

 

루카 복음 19장 41절에는 '에클라우센 에프 아우텐'(eklausen ep auten; and wept over it)이 나온다.

 '~에 대하여'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epi)의 축약형인 '에프'(ep)와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키는 여성형 지시 대명사 '아우텐'(auten)이 기록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그를 위하여 우셨다'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 재앙을 정확히 내다보시고 이에 대해 슬퍼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eklausen)의 원형 '클라이오'(klaio)는 '울다', '곡하다', '애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감정을 삭이며 소리 죽여 우는 내적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격렬한 비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을 영혼의 부르짖음 같은 통곡으로 표현하셨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멸망하게 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메시아적 슬픔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42절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여기서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의 원형 '에이레네'(eirene)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은 뜻의 희랍어로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생기는 '구원' '충만한 은총'  '진정한 기쁨'을  의미한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에 해당하는 '타 프로스 에이레넨'(ta pros eirenen; what would bring you peace)에서, 전치사 '프로스'(pros) '~에 속한' (belong)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문자적으로 '평화에 속해 있는 것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만 진정한 구원과 평화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과 충만한 은총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끝으로 42절 '감추어져 있다'에 해당하는 '에크뤼베'(ekrybe; it is hidden)는 부정과거 수동태인에,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져 지금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효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를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단어가 수동태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완고해진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해서 예수님께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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