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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왕 대축일] 진리를 증언하려고 (요한18,33ㄴ-3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21 조회수85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1월 21일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진리를 증언하려고 (요한18,33-37)

   

1독서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이다.>(다니엘7,13-14)

13 내가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화답송 시편 93(92),1ㄱㄴ.1-2.5(◎ 1)

◎ 주님은 임금님위엄을 입으셨네.

○ 주님은 임금님위엄을 입으셨네주님이 차려입고 권능의 띠를 두르셨네

○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네예로부터 주님 어좌는 굳게 세워지고영원으로부터 주님은 계시네

○ 당신 법은 실로 참되며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서리나이다주님길이길이 그러하리이다

 

2독서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습니다.>(묵시1,5ㄱㄷ-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아멘.

보십시오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아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음<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요한18,33-37)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33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제1독서 (다니7,13-14) 

다니엘서 7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다니엘서 7장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다니엘서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다니엘서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는 '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은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이라기보다는,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스런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제2독서 (요한묵시1,5ㄱㄷ-8)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6)

 

6절 역시 5절에 이어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찬양과 영광송으로써 본절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를 한 나라로 이루어 사제로 삼으셨다' 는 것이다. 이것은 5절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구속 사업의 두가지 결과를 언급한 것이다.

 

이것 역시 탈출기 19장 5절과 6절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 라는 문구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것을 인용하여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2,9)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던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킴으로써 집합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후 단절되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대속적 죽음으로 회복시킴으로 인하여 개별적으로는 성도 개개인을 직접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사제(히에레이스; hiereis)로 만들었다.

 

전자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적 지위를 부각시킨다면,v후자는 거룩하신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직접적 접근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내용은 묵시록의 결론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반복 선포된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묵시21,3)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묵시21,24).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위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실은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이란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세우신 인류 구원 사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이 오로지 성부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음은 본문 뿐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도 누차 강조되고 있다(요한6,38-40; 8,42 ;10,37.38 ;17,4).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가 되고 또한 개별적으로는 영적 사제가 되게 하는 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사건 앞에서 요한 사도가 이것을 가능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 무궁하기를 비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여기서 '영광'으로 번역된 '독사'(doxa)는 본래 '영예'나 '명성'을 뜻하며, 하느님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에는 '신성으로 거룩하심','존귀나 위엄','권능' 등을 뜻한다. 그러나 원초적으로는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하는 대상을 드러내 보인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사제 삼으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러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신다(요한17,5).

하느님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신 분이요, 하느님의 유일한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셨으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영원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편, 여기서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는 일반적으로 '신적 권세' 나 '통치권'을 의미한다. 여기서 언급된 '크라토스'는 '적에 대한 승리' 또는 '법이나 규칙에 의한 통치'를 뜻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 표현으로부터 오늘날 '민주정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나 '전제정치'를 뜻하는 '오토크라시'(Autocracy)등의 '크라시' 단어가 파생되었다.

 

이러한 권세와 능력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마지막 통치를 연상시키는데, 요한 사도는 묵시록의 머리말인 1장 5절, 6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승리적 통치 언급한다.

이것은 총체적인 악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 역시 묵시록의 뚜렷한 주제가 될 것임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묵시록의 앞으로의 전개 방향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7)

 

'보십시오'(이두;idu)라는 감탄사를 필두로 시작되는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재림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리라는 기대는 이미 공관복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온다 (마르코13,26; 14,62; 마태24,30; 26,64; 루카21,27). 그래서 혹자는 이러한 진술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종말론적인 후렴구' 로 간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절은 다니엘의 환시와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7장 13절에는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이나 히브리 사상에서 '구름'(톤 네펠론; ton nephelon)은 주로 '하느님의 임재와 현현' 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탈출13,21;16,10; 마태17,5 ; 사도1,9).

따라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는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신적 임재와 현현 나타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진술이다.

 

특히 여기서 '오십니다'로 번역된 '에르케타이'(erchetai)는 본래 '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르코마이'(erchomai)의 직설법 현재형이지만, 여기서는 미래적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묵시3,11; 22,7 ; 12,20).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재림의 성격이 그의 강생과는 대조적으로 공개적일 것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눈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재림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될 것이며, 그분을 '찌른 자들'도 그분의 재림을 볼 것이다.

 

여기서 '찌른'으로 번역된 '엑세켄테산'(eksekentesan)은 '분리'나 '이탈'의 의미를 나타내는 '에크'(ek)와 그 자체로 이미 '찌르다', '꿰뚫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켄테오'(kenteo) 합성어인 '엑켄테오'(ekkenteo)의 부정 과거형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 본문과 즈카르야서 12장 10절을 인용한 요한 복음 19장 37절에서만 등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요한19,37).

 

그런데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찌른 로마 병사는 한 명이었지만, 그분을 찌른 자들이 복수형으로 나온 것은, 그 배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정치 권력의 야합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당시나 모든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증거를 '적대적으로 대한 모든 이들'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는 그의 재림이 그 자체로 축복이지만, 그것을 적대적으로 대한 모든 이들에게 있어 그의 재림은 그 자체로 심판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즈카르야서 12장 10절에서 "그리하여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은 이러한 사상을 계승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슴을 칠 것이다' 로 번역된 '콥손타이'(kopsontai)는 문자적으로 '자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콥토'(kopto)의 미래 중간태로 '자기 자신을 자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묵시록에서 바빌론으로 상징된 로마의 패망과 관련되어 언급된 바 있다(묵시18,9).

 

그런데 즈카르야서 12장 12-14절을 감안하면, 묵시록 19장 9절이하는 '바빌론 왕들의 비통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땅'(게스; ges)이라는 표현이 첨가되어,   애통함과 비통함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향이 '땅에 있는 모든 종족', 곧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으로 통칭되는 전 인류(묵시5,9 ;7,9 ;10,11 ;13,7 ;14,6 ;17,15)에게 미칠 것이라는 계시가 아닐 수 없다.

 

이 놀라운 일은 진실로 반듯이 될 일이므로,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나이 아멘; nai amen) 이란 표현을 덧붙이는 요한 사도의 기록은 너무나 타당하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로 번역된 '나이'(nai)는 '아멘'과 동일한 의미로서, '나이'가 희랍식의 긍정을 의미한다면, '아멘'(amen)은 히브리식의 긍정을 뜻한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 (8)

 

하느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소개한다. '알파와 오메가' 희랍어 알파벳의 처음과 끝글자를 뜻하므로, 의미상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끝' 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희랍 철학의 전통을 감안할 때,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은 '지극히 높으신 신의 영원성'을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본절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자기 칭호인 '알파와 오메가'는 묵시록 전체의 구조와 관련해서 매우 독특한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또한 만물을 종말론적인 성취로 이끄실 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신적 자기 선포 묵시록에서 단지 두 차례만 등장하고 있다. 

첫번째는 요한 사도가 환시를 보기 전인 묵시록 1장 8절에서 등장하고, 두번째는 하느님의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종말론적인 성취가 '다 이루어졌다' 라고 선포한 바로 그 시점에서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라고 언급된다(묵시21,6).

 

말하자면, 요한 사도는 자신의 저술에 교차 대구법적인 구조를 사용하며,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느님의 면모를 매우 정교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께서는 창조의 시작으로 '알파'이시며, 새 창조(구원)의 완성으로 '오메가'이신 것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복음 (요한 18,33ㄴ-37)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인류 역사는 권력과 힘을 가지려던 수많은 왕과 권력가들이 이룬 흥망성쇠의 역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몫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수단과 방법이 불의해도 역사를 주도한 인물들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해석되고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권력의 희생양이 된 민초들의 삶과 억울하게 당한 소수의 역사는 왜곡되고 억압되며 멸시당해 왔습니다. 


교회 역사의 어두운 시기에도 교회의 권력에 희생된 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구촌에는 여전히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이들이 많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를 꽃피운 나라들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권 의식이 성장하고 있고,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제재와 감독은 물론 공직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시민 의식도 커 가고 있습니다. 

정경 유착과 적폐 청산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목마른 시민들이 이룬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도 세계사적으로 주목을 받지만, 여전히 권력의 시녀로 살아오며 잘못된 이념 논쟁의 희생양이 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역사에서는 실패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2천 년이 지난 오늘 그분의 진리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깨달은 신자들의 순교와 영웅적 신앙 고백을 통하여 승리하신 왕이 되셨습니다. 

권능의 상징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며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시는 선언은, 세상이 완성되는 날까지 교회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복음입니다.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며 살아갑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그리스도 왕 대축일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37)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아일 수도 있다는 믿음도 있었고 그래서 진짜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도 못살게 굽니다.

그러나 진정한 메시아는
단순히 우리를 세속권력자에게서 해방시켜 주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라 좀 괜찮은 정치가일 뿐이겠지요.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정치권력의 압제에서가 아니라 우리를 참으로 구속하는 어둠과 악의 세력, 죄와 악습의 사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분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심으로써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시는 참 임금이요 참 메시아이십니다.

아직도 세상의 행복과 재물의 축복을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나는 예수를 나의 진정한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그분을 훌륭한 정치가 중의 한분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왕에 대한 진술이 우리를 진리를 통해 더 자유로워지는 날임을 선포하는 그런 날이길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나의 주님, 나의 임금이시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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