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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12.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21-12-11 조회수1,270 추천수4 반대(0) 신고

 

                                                   루카 3, 10-18(대림 3주 주일)

 

대림 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 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스바 3,15.17)

 

이처럼, 그가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그들의 삶 안에, 그들의 현장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2독서>는 필립비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곧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유배 중에 있으면서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생활과 하느님 말씀묵상과 성사거행과 공동체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가 일수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로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저희의 거부로 상처 입습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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