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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기념일 독서,복음(역주,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12-13 조회수696 추천수0 반대(0) 신고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스페인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한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에 입학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 후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영혼의 어두운 밤>,<영혼의 노래>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기념일 독서 역주(1코린 2,1-10)

1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도, 나는 탁월한 말이나 지혜로운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전하려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이분을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으로밖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3 또한 나는 약함과 둘움과 많은 떨림속에서 여러분에게 갔습니다.

4 그리고 나의 말과 나의 선포로 설득력있는 지혜로서가 아니라 영과 능력의 드러냄으로 (되었습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통한 깨달음

6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물론) 지혜를 말합니다마는 이 지혜는 현세의 것도 아니요, 멸망한 현세 통치자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오히려 우리는 신비 속에 감춰저 있던 하느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기들 이전에 예정하신 것이고

8 현세의 통치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깨달았더라면 그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9 그러나 기록되어 있듯이, “눈이 본 적도 없고 귀가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련해 두셨습니다.”

10ㄱ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영을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주해

1

하느님의 신비는 일부 사본에는 증인”.

 

2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이해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구절이다.

 

3

처음 코린토에 왔을 때 바오로는 박해받는 마케도니아의 교회들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여러 곳에서 계속 박해를 받으며 코린토까지 왔었다. “두려워하고 떠는약한 모습으로 왔다는 바오로는 복음선포자들의 험락함 속에서 오히려 더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시도록 하려고 더더욱 가까이 내 약점들을 자랑하렵니다라고 고백했다.

 

4

영과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도 문맥에서 보면 코린토 공동체 내에 있던 열광주의자들이 생각한 대로 놀라운 언변과 기적 등으로 과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드러내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드러났던 방식이다.

 

6

완전한 사람들모든 그리스도 신앙인을 의미하느냐 아니면 그 가운데 성숙한 신앙인들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의견이 갈라진다. “성숙한 그리스도 신앙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으나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현세의 통치자들에 대해 말하는가 하면 세기들 이전에 감춰져 있던 하느님의 지혜를 ...영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다”(7.10)라고 말하는 가까운 문맥을 보면 비그리스도 신앙인에 대비하여 모든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현세 통치자들은 이 세상 통치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7

로마 16.25; 에페 1.4 참조.

신비속에 감춰져 있던은 로마 8.29-; 1고린 3.18;4.6 참조.

 

8

영광의 주님”: 구약성서에는 야훼의 영광이라는 표현이 많다. 야훼의 속성을 속성을 임위하신 빛남이라는 관점에서 표현한 것인데. 바오로는 바로 예수를 영광의 주님이라고 부른다.

 

9

로마 8.29-: 2코린 3.18: 4.6 참조.

 

10

10-16절에서는 영을 통한 하느님 지혜의 깨달음에 대해 논한다. “또는 영광이라는 말이 매우 자주 나온다. “그리스도는 단락 끝에 비로소 나온다. 그러나 내용의 흐름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향한다.

 

 

 

루카복음 역주(14,25-33)

제자가 되려면

25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몰려오자 돌아서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26 누가 내게로 오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과 형제들과 자매들과 심지어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27 제 십자가를 매고 내 뒤를 좇아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28 사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망대를 세우려 한다면, 완성할 만큼 자금이 있는지 우선 앉아서 계산하지 않겠습니까?

29 그가 기초만 놓고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모두 그를 비웃기 시작하여

30 ‘이 사람이 세우기 시작만 하고 완성하지 못했구나할 것입니다.

31 혹은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간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거슬러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앉아서 우선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32 만일 당해 낼 수 없다면, 그나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를 위한 방편을 청할 것입니다.

33 이처럼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모두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해

제자가 되려면

루카는 이 단락에 가족보다 예수 당신을 더 사랑하라는 단절어(26). 십자가를 매라는 단절어(27). 망대 구축과 전쟁 수행의 이중비유를 수집해 놓았는데, 그 내용은 한결같이 추종에 관한 것이다. 루카는 추종 집성문(26-32) 앞뒤에 25.33절을 형성.첨가하여 집성문의 테두리를 만들었다.

 

26

26절은 그 변체가 마태 10.37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루카와 마태오를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데, 루카에서는 가족을 미워하라고 하시고 마태오에서는 예수보다 가족을 덜 사랑하라고 하신 점이 돋보인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미워하다라고 표현하는 사례가 잦다. 가족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효도를 강조하셨다.(마르 7,10-12: 10.19),

그러나 혈연관계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셨다.

혈연관계보다 추종을 더 소중히 여기셨다.

가족을 떠난 제자들에게 종말 축복을 약속하셨다.

 

27

십자가를 메라는 단절어는 두 갈래로 구전되어 한 전승은 어록에 또 한 전승은 마르 8.34에 수록되었다. 또 한 전승은 마르 8.34에 수록되어 있다. 마르 8,34를 기준으로 단절어의 원형을 복구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누가 내 뒤를 좇아오려거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28

망대와 전쟁 이중비유는 루카 특수자료. 망대를 세우려면 미리 경비를 계산하고 전쟁을 하려면 미리 승산을 있을지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려면 끝까지 따를 수 있을지 먼저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기 때문이다.

 

33

망대를 세우려면 우선 경제력을 갖추어야 하고, 전쟁을 치르려면 우선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아무것도 갖추지 않는 무소유가 선결조건이다. 루카는 남달리 재물의 위험을 경고하고 제자들의 재물 포기를 강조했다. 33절은 루카의 가필일 개연성이 크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감만 못하다."는 말이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다가 중지한다면 간만큼 성과가 있다라고 봅니다.

회개하고 믿을때 그를 따라다니다 말고 도중에 그만두었더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그만큼 다가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한번 따라다닌 사람은 도중에 

그만두더라도 언젠가는 다시금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지요.  회개했다가 죄를 짓고 또 뉘우치고 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배반한 이스카리옷 유다만 아니면 됩니다.  이는 따라다니다 도중에 그만두고 아예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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