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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밥굶은 부모, 희망잃은 N포…그나마 복받은 베이비부머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21-12-16 조회수843 추천수2 반대(0) 신고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93)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날엔 따뜻했던 어린시절이 떠오른다. [사진 pxhere]

그때 먹인 웃음소리

꾸물꾸물 진눈깨비 흩날리는 날엔
산그늘 속에서 꿈꾸시는 부모님을
콩기름 잔뜩 매겨 반지르르 누런빛
잘 익은 황토방 장판에서 만나봅니다
형이랑 씨름하다 심술 구멍 내어
막내가 종아리 걷고 회초리 맞던 곳
삐쳐 울먹일 때 문 뒤에 숨어
손가락 침 묻혀 구멍 뚫어 보았지
실 구멍 창호지엔 황소바람 숭숭
늦가을 김장마저 마쳐 한가한 볕이 좋은 날
어머니는 장을 만들 메주 쑤는 날
군불 지펴 몇 년 입맛을 지어내셨다
그날은 문창호지 떼는 날
원 없이 주먹 구멍 뚫다 물바가지 세례에도 까르르
앙증맞은 여동생 손에 덕지덕지 붙은 한지 떼 내고
책갈피에 고이 말려둔 은행잎 국화잎 코스모스,
달빛과 쓰르라미 반가운 손님들 기꺼이 문 열라고
문 꼬리 언저리에 마름하여 붙였다
아버지는 군불로 달궈진 아랫목에
씨줄 날줄로 기쁨과 애환이 기운 격자무늬 초배지
그 위에 아무렴이란 한지 장판을 덧바르고
맷돌에 간 콩을 수북이 땀방울마저 섞은 베주머니를 짜
할 수 있는 일이 사랑에 새가 뜨지 않게 할 뿐인 양
가난한 윗목 아랫목 골고루 콩기름을 먹이셨다
뜨끈한 구들장에 귀대고 누어
나이 들어 꺾인 허리 지지니
그때 먹인 웃음소리
얼룩진 문창호지와 장판이 게워낸다

 

해설
얼마 전에 아버님께서 먼저 가신 어머님을 뒤따라 선종하셨다.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위하시며 16년 간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에 누워 계시던 어머님을 간병하셨다. 결국 같은 병원에 두 달 정도 입원하셨다가 94세를 일기로 떠나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가 제한되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야 병원 측 배려로 마지막 임종면회가 허락되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탓에 명확한 의사표현은 할 수 없었지만, 우리 내외와 손자의 손을 힘껏 잡으셨다. 사랑이 넘치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동안 당신을 모시느라 고맙고 수고했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았다.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자식으로서 아무리 힘든 일이었더라도 내세울 공이 아닌데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평소 한국 남자의 전형처럼 말수 없고 무뚝뚝해 살가운 맛이 부족하셨지만, 가족이 아닌 주변에는 속 깊은 마음을 깨달아 늘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남은 우리 2남1녀의 자식도 서로 자기가 아버님께 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실례를 기억하며 자랑했다. 이제야 듣고 보니 장남인 내가 잘 몰랐던 사연이 있었다는 게 부럽고 샘이 날 정도였다. 사실 나도 아버님을 닮아 오사바사한 성격이 못 된다. 아버님은 주견은 있으되 부드럽지 못하셨다.

 

많은 식구가 매일 밥을 지어 먹고 반찬을 마련하는 일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 먹을 양식과 땔감을 준비하는 게 주부가 처리해야 할 걱정 중에 첫 번째였다. [사진 Pixabay]

우리 부모님 세대는 정말 힘든 고난의 시기를 몸으로 부닥치며 살아내신 세대다. 28년 용띠 생으로 왜정시대에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마쳤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한국전쟁 내내 참전하여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 그러고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온갖 잡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야만 했다. 비록 지금 N포 세대도 힘들고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굶는 걸 당연시 하지는 않는다. 당시엔 하루하루 생존이 급선무였다. 지금에 생각하니 내가 태어나고도 아주 오랫동안 아버님은 뚜렷한 직업이 없으셨다. 인생의 초기와 황금기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견뎌야 했으며 또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살아내셨는지 정말 존경스럽다. 부모님과 자식 세대에 비하면 우리 연령의 세대는 복을 많이 받은 게 틀림없다. 감사하고 미안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당시엔 모든 가정이 거의 그렇게 살았다. 한 집에 조부모와 삼촌들이 함께 사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던 때다. 핵가족이란 말도 아주 뒤에 생겼다. 그러니 많은 식구가 하루하루 밥을 지어 먹고 반찬을 마련하는 일이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우내 먹을 양식과 땔감을 준비하는 게 주부들이 처리해야 할 걱정 중에 첫 번째였다. 늦가을이 되면 수백 포기 김장을 담아 땅에 파묻고,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황소바람이 술술 들어올 문창호지를 새로 바르는 일이 급선무였다.

 

또 각 가정은 음력 정월에 집에서 쓸 간장을 담갔다. 간장이 맛있어야 모든 음식이 맛깔스러워 진다. 거기에 쓸 메주를 100일 전에는 쑤어 만들어야 했다. 간장과 메주를 사다 쓴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주 나중에야 장에서 사다 썼다. 메주콩은 일반 콩과 달랐다. 백태라고 부른다. 아주 둥글게 생겼다. 연한 노란 색인데도 검은 콩과 비교해 흰콩 즉 백태라고 불렀다. 메주를 쑤는 날이면 어린 나는 구수한 콩 삶는 냄새에 흥분 되었다. 삶은 콩 한 주먹을 얻어먹을 요량으로 가마솥 근처를 계속 맴돌았다. 충분히 익어 절구에 넣고 찧기 전에 어머니께서 내게 한 줌을 건네주셨다. 아주 맛있었다. 지금도 그 구수한 콩 맛이 입안에서 맴돌아 군침이 돈다. 콩이 어느 정도 잘게 찧어지면 큰 벽돌 모양으로 메주를 성형하여 마루에 널어논다. 그리고 알맞게 굳으면 새끼줄로 엮어 방에 걸어 말린다. 방바닥의 뜨거운 온도와 웃풍이 부는 방 상부의 차가운 온도가 대류를 일으켜 메주를 띄우는데 최상의 조건이 된다. 그러다가 메주곰팡이가 피면 밖으로 내다 넌다. 한 백일이 지난 정월 말날(午日)에 간장을 담근다. 말날에는 잡귀가 붙는 손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구멍 난 문창호지를 떼 내고 새로 문창호지를 바르는 것도 가을에 온 가족이 나서서 하는 일이다. 또 몇 년에 한 번 장판도 새로 도배를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모두 가장이 나서서 직접 해야 했다. 격자무늬 창에 문창호지를 바르는 일은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먼저 오래 된 창호지를 물에 불려 깨끗하게 제거한다. 이때 어린아이들은 평소에는 함부로 뚫을 수 없었던 구멍을 마음껏 낼 수 있어 아주 기쁘게 동참한다. 주먹으로 마음껏 구멍을 내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 문살에 뿌리고 깨끗하게 문창호지를 제거하는 건 일이라기보다 물싸움도 할 수 있어 큰 재미도 주었다.

 

맏이라서, 막내라서, 여자라서가 아니라 각자가 특별한 기억을 평생 지니고 살 수 있게 마련하고 배려하신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사진 PIXNIO]

밀가루 풀을 쑤어 한지에 고루 바르고 미닫이, 여닫이문 전체에 꼭 맞게 붙이는 건 세심한 솜씨가 필요하다. 문창호지를 붙이고 나서 입안에 물을 머금은 후 훅하고 물을 골고루 뿜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수분이 증발하면서 종이가 들뜨지 않고 팽팽하게 마른다. 요즘 같으면 분무기로 뿜었겠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입으로 뿜어 골고루 뿌리는 솜씨는 잊지 못하겠다. 또 손길이 자주 가는 문 꼬리에는 튼튼하라고 일부러 두 겹의 종이를 붙여 질기게 보호했다. 이왕 두 겹으로 덧붙일 때 멋있으라고 그 사이에 은행잎이나 국화잎, 코스모스 잎사귀를 정성껏 말렸다가 모양대로 잎을 떼어 붙였다. 이때 각 집안의 전통과 품위, 디자인 솜씨가 그대로 드러났다. 디자인이 멋있을수록 사용하는 사람이 조심히 문을 열게 된다. 한마디로 말없는 가정교육의 현장이 된다.

 

장판지 바르는 일은 더 세심한 기술과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얇은 한지로 초벌을 붙인다. 이때도 아무렇게 붙이는 게 아니다. 방바닥에 붙인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기에 모서리를 잘 마름질하고 적당한 간격으로 덧대어 씨줄과 날줄을 맞추어 나갔다. 마치 피륙을 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약간 질기고 두툼한 닥종이로 만든 장판지를 그 위에 덧붙인다. 그러면 저절로 두께 차이가 생겨 방안에 요철 무늬가 생긴다. 이 무늬를 보면 그 집안의 솜씨와 정성을 가름할 수 있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젠 콩기름을 먹일 차례이다. 베보자기에 곱게 간 콩물을 담고 들기름을 섞어 콩기름을 만든다. 방에 군불을 때 뜨끈하게 가열한 뒤 정말 구석구석 꼼꼼하게 콩기름을 먹인다. 이때도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어느 한 곳도 손길이 빠지면 안 된다. 바로 표시가 난다. 아마 수 십 차례 손길이 가야만 했다. 또 이음새 부분이 들뜨면 장판이 쉽게 망가지므로 들뜨지 않도록 처음부터 조심하고, 접착제 역할을 하도록 특별히 기름을 더 먹어야 했다.

 

방바닥 도배를 하는 건 정말로 정성과 온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회상하며 동생들이 서로 내가 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남이 모르게 구석구석에 손길을 주어야 하는 작업이다. 맏이라서, 막내라서, 여자라서가 아니라 각자가 특별한 기억을 평생 지니고 살 수 있게 마련하고 배려하신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감사의 작별인사를 올린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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