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최초의 참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압송로 도보순례 후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12-17 조회수797 추천수3 반대(0) 신고

 

우리나라 최초의 참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압송로 길을 걷기 위해 11월 27일 전주교구청에서 출발해 현 진산초등학교 자리에서 새벽 2시 25분에 출발했습니다. 예전에는 그곳이 진산관아였던 자리였습니다. 사실 이번에는 1년 전에 허리를 다친 게 아직 완쾌되지 않아서 막판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차량이 캄보이를 하기 때문에 걷을 수 있는 구간까지만 걸으면 된다고 하루 전에 호남교회사 소장님이신 신부님의 동생이 전화를 주셔서 부득불 참가하긴 했지만 사실 이번엔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어떻게 해서 완주를 하긴 했습니다. 참가하기 전에는 사실 10킬로미터도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녀 와서 바로 느낌을 적어야 하는데 20일이나 지나 적으려고 하니 조금은 그때의 감동이 없긴 없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전달해보겠습니다.

 

사실 이번 참가를 하면 네 번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재작년에는 고산 성당에서 그만 포기했습니다. 그땐 다리 컨디션이 엉망이어서 그랬습니다. 총 세 번 완주를 하게 된 셈입니다. 출발하기에 앞서서 호남교회사 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신 신부님께서 압송로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인 사실을 언급하시면서 이번에는 각각 쉬는 구간에서는 칠극을 가지고 구간마다 일곱 가지 주제로 묵상을 하며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복자 공술기와 심문기를 읽으며 도보순례를 했습니다.

 

이번 순례에서는 출발을 하고 걸으면서 처음 쉬는 곳까지 평소 다른 해보다 조금 빠른 페이스로 걸어서 그랬는지 처음엔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첫 휴식을 앞두고 산 계단을 올라가는 구간이 있었는데 아마 이 구간에서 참가하신 분들이 조금은 힘들었을 겁니다. 싱그랭이라고 하는 곳에서 복자들께서 조반을 먹었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그래서 해마다 싱그랭이에서 저희도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이번에 전동성당 주임신부님께서 참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어제로 해서 다 끝났습니다만 전동성당에서 이번에 9일 기도가 있었는데 주제가 칠극이었습니다. 일곱 가지 주제와 첫날과 마지막 날 다른 주제로 해서 총 9일 동안 진행된 것입니다. 이 행사를 진행하시기 위해 기도하시는 마음으로 참석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참석하셨습니다. 처음 참석하셨는데 신부님은 상당히 잘 걸으셨습니다. 낮에 제가 중간에 전주교구 순례 지도 신부님과 대화를 하면서 처음 참가하셨는데 상당히 잘 걸으시는 것 같다고 하니 군종신부 출신이라 그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구간에서 제가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상당히 잘 걸으신다고요."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재미있었습니다. "나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상당히 힘듭니다." 그때 신부님의 얼굴 표정을 보니 사실 같았습니다. 그렇긴 해도 아무튼 속으로 인내를 하긴 하셨지만 걸음걸이 모양을 보면 고통스러움을 표내지 않으시고 무난하게 잘 걸으셨습니다. 이분은 보니 사진 찍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쉬는 구간에서는 지금 그곳 장면은 기억나지만 자료를 봐야 어디인지 알겠습니다. 그곳에서 사도요한 이영춘 호남 교회사를 맡고 계신 신부님께서 하늘의 별자리를 보시면서 작년에도 말씀하셨는데 올해도 말씀하셨습니다. 두 분의 복자가 저 별자리를 보시고 무엇을 묵상했을까? 오리온 별자리인지 아마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묵상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 상상으로 하신 말씀이시겠죠. 

 

올해는 출발하기에 앞서서 신부님께서 강조하신 게 있습니다. 가능하면 사적인 이야기보다 복자분들과 하느님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묵상하기를 권고하셨습니다. 작년에도 그렇지만 특히나 이 순례길에서는 별이 무수하게 많이 있었습니다.

 

배둔산 국립공원 입구 쪽으로 내려가는 구간에서는 해마다 보면 마치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별이 많이 있습니다. 쉴 때 신부님께서 별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에 그 별들을 보면서 230년 전에도 두 분 복자께서도 저 별들을 보시면서 걷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어느 구간에서는 제가 신부님께 “이 순례를 만약 교황청에서 전대사를 주게 된다면 아마 많이 참석하지 않을까요?” 하니 신부님께서는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 자체만으로도 은총이라고 하셨습니다. 걸으면서 신부님의 말씀을 묵상해봤습니다.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올해는 더 의미가 있는 순례였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230년 만에 두 분의 유해와 또 윤지충 복자 동생의 유해 이렇게 세 분의 유해를 발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기에 한국 천주교 역사에 큰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압송로의 길은 은총을 떠나서 그분들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했는지를 묵상하는 게 더 의미가 있는 순례가 될 것입니다. 같은 도보이지만 그냥 도보순례도 많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같은 길을 걷는 순례이지만 그냥 일반적인 순례는 단순한 도보에 의미가 있지만 이 순례는 그 의미에다 순교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 길을 걸으면서 좀 더 신앙적인 측면에 의미를 두고 많은 묵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리가 거의 60킬로미터입니다. 정확하게 구분은 할 수 없지만 대충 봐서 반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30킬로미터는 잘 걷는 분이나 잘 걷지 못하는 분이 약간은 표시가 날 수 있지만 반을 넘어서서는 그때부터는 정신력으로 걸어야 합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정신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 걸으면서 많은 것을 묵상했지만 그때 한 묵상이 잘 생각나지 않아 조금 아쉽습니다.  2년 전에 순례를 전동성당에서 마치고 나면 뒷풀이를 항상 하는 식당이 있는데 그곳에서 순례지도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이 순례를 마치면 돌아가서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고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 하는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순례를 마치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이런 묵상을 해봤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삼일 동안 모리야 산을 오를 때를 말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아브라함은 그 길을 걸어갔는지는 모르지만 혹 이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주실 때는 언제인데 이제 와서 그런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다면 이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는 인간적으로 온갖 갈등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냥 상상입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두 분의 복자도 그 길을 가면서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날라가게 되는 상황이 될 수가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보통 인간적인 생각이라면 그냥 중도에 그간 했던 일에 대해 잘못했다고 말하고 목숨을 건지려고도 얼마든지 하려면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남기신 기록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는 그분들의 신앙은 저희에게 하나의 경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처럼 체계적으로 종교적인 형식으로 인해 신앙을 받아들인 게 아니고 순전히 책을 통해서만이 학문적으로 받아들인 서학을 신앙으로 승화시켰다는 사실만 해도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는 우리나라 천주교 신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분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분들의 유해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는 인터넷을 보시면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그걸 참조하시면 그 내용에도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감동을 주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 검색해서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이제 저는 다른 체험기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도 압송로를 걸으면서 올린 체험기가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적지 않으려고 했는데 올렸습니다. 실제 제가 알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이번에는 순례를 지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7시 반 정도에 도착했을 겁니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좀 일찍 출발해서 사실 처음엔 더 일찍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늦게 도착했습니다.

 

어느 해에는 3시에 출발해서 7시에 도착을 해서 딱 17시간 소요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뒷풀이를 아마 코로나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전동성당 지하에 교육관인지 하는 곳에서 성당에서 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저도 처음 가본 곳인데 그곳에서 간단하게 국수랑 간식을 먹고 순례를 마무리 했습니다. 저는 사실 순례를 한 후에 원래 계획은 전주에서 몸 컨디션 상태를 봐서 1박을 하고 갈매못 성지를 다녀오거나 아니면 대전 교구에 아는 신부님을 만나거나 아니면 광주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계신 신부님을 만날까 하는 세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뒀습니다.

 

성당에서 해산을 하고 난 후에 저는 해마다 전주교구청에 주차를 하고 가기 때문에 교구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언급한 적도 있는 분인데 한 자매님도 항상 교구청 주차장에 주차를 하십니다. 어떤 형제님이 저와 자매님을 교구청까지 카풀을 해주셨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했습니다. 사실 순례 도중에 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마 제 차에서 출발하기 전에 충전을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짐을 챙기면서 빠트린 줄 알고 차에 폰이 있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 분실한 게 있었습니다. 중간에 고산성당에서 해마다 두부와 간식을 먹습니다. 그곳에서 그때 넥워머를 분실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그곳을 출발한 후에 알았던 것입니다.

 

그냥 저는 분실했다고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근데 그걸 마침 교구청 주차장에서 찾게 된 것입니다. 고산성당에서 간식을 먹었는데 그때 저랑 카풀을 하고 오신 자매님의 남편이신 형제님이 귤과 에너지바를 빨랑카하셨습니다. 그걸 어떤 분이 전동성당으로 나머지를 옳겨놓으신 것 같습니다. 해산하면서 그 짐을 자매님께서 챙기셨는 것 같은데 교구청에서 내리면서 짐 정리를 하시고 있을 때 제가 작별 인사를 하려고 갔습니다. 자매님께서 혹시 이거 베드로씨 것 아니냐고 하셔서 그렇게 해서 제 넥워머를 찾게 된 것입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어떤 분이 고산성당에서 정리를 하다가 넥워머를 주워서 짐 속에 보관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또 그게 제 것인지를 자매님이 제 복장을 잘 보신 것 같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저는 그냥 완전히 분실했다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난 후에 저는 차에 가 폰을 찾기 시작했는데 폰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앞이 캄캄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자매님이 바로 주차장에서 작별 인사를 한 후에 떠나시는데 이번에는 아마 최소 15분 정도 차에 있다가 출발하셨습니다. 

 

마침 이번에는 신부님 동생 분도 그곳에 주차를 했습니다. 그때서야 제 차에 폰을 놔둔 게 아니고 버스에서 분실한 것 같아 다행히 자매님께서 늦게 출발하시는 바람에 어떻게 순례를 담당하는 형제님께 전화를 할 수가 있었고 다행히 버스 기사님과 통화를 했지만 버스에는 없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완전히 저는 그렇다면 순례길에서 폰을 분실했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폰을 못 찾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일단은 쉬어야 하고 해서 항상 전주에서 숙박을 하면 가는 집이 있는데 그곳에 가니 폰이 없으니 백신 증명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그곳에 숙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찜질방에 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찜질방까지 백신 증명이 있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할 수 없이 몸 상태가 좋지 못해 차에서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벽까지 전주 외곽에서 차를 주차하고 잠을 잔 후에 폰을 완전히 분실했다고 생각해 어쩔 수 없이 아침에 폰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부득불 마산으로 왔습니다. 

 

저는 전주 외곽에서 쉬면서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그때 윤지충 바오로 복자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복자님, 복자님을 기리기 위한 순례를 하다가 폰을 분실했습니다. 복자님 꼭 폰을 찾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넥워머를 찾은 걸 보고 그런 희망을 가지고 했던 것입니다. 마산에 도착한 후에 혹시나 싶어 행사 진행하는 형제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버스 기사님께 소식이 왔는지 해서요. 근데 원래 기사님이 처음엔 없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폰을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폰을 발견하시고 나서 그 폰을 기사님이 초남이 성지 사무실에 맡겨놓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습니다. 왜 폰이 초남이 성지에 있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기사님이 초남이 성지를 자주 방문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단 초남이 성지 사무실에 맡겨놓으신 모양입니다.

 

아침에 신부님 동생과 통화를 하면서 형제님이 맡아주시겠다고 했는데 제가 전주에 있으면 바로 가면 되는데 마산에 있어서 일단 초남이 성지로 전화를 해서 사무장님께 택배를 착불로 해서 부탁을 드렸는데 어떤 이유로 조금 힘든 부분이 있어서 제가 주일 미사를 본당에서 봉헌하고 나서 다시 초남이로 가 수령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물론 몸은 피곤했지만 폰을 분실해서 다시 찾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남이를 가게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실한 폰을 생각지도 않게 초남이 성지에서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윤지충 바오로 복자님께서 제가 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복자님께 감사의 화살기도를 했습니다.

 

초남이에 도착을 한 후에 사무실로 가니 사무장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무장님이 확실한 분이셨습니다. 사무장님 폰으로 제 폰으로 전화를 하게 하신 후에 제가 주인이라는 걸 확인하시고 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폰을 찾게 된 것입니다. 잠시 감사의 인사를 한 후에 떠나려고 하는데 사무장님이 초남이에 언제 왔느냐고 해서 몇 번 왔다고 하니 제가 마지막으로 왔을 땐 세 분의 복자를 모시지 않았고 지금 조금 떨어진 교리당에 복자님을 모셨기 때문에 참배를 하고 또 십자가의 길 기도도 만들었기 때문에 교리당 참배를 권유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조성할 무렵에 카풀하신 자매님과 한번 초남이를 자매님 차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조성이 완전하게 되지 않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기사를 통해 초남이 근처에 모셨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교리당인 줄은 몰랐습니다. 교리당에 가서 참배를 하는데 정말 가슴이 뭉클하고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성광에 세 분의 유해를 모신 걸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현시를 해놓으셨더군요. 실제 작지만 유해를 보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30년 전 순교의 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습니다. 

 

여러 성지를 다녀봤지만 성지를 가게 되면 순교자 묘소만 볼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유해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대여섯 번 초남이를 가봤지만 이전에는 사실 호남의 사도 유황검 복자의 생가 터라는 그 사실만 가지고 갔고 실제 성지라는 느낌이 밋밋한 게 사실이었습니다. 마치 마산교구 명례성지처럼 생가 터라는 의미만 있었는데 이번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복자님의 유해를 볼 수 있고 또 공경할 수 있는 성지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뜻 깊은 성지로 된 것 같습니다. 경당 밑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습니다. 제주도 이시돌 성지에 있는 십자가 14처를 만드신 작가님이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성지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지만 입체적으로 실감나게 조성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한 후에 다시 저는 마산에 내려왔습니다. 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복자님의 유해를 경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 같았습니다. 저한테는 어쩌면 이번 압송로 도보 순례를 하게 되면서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순례는 저에게 의미 있는 순례였습니다. 많은 성지도 있겠지만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정말 의미가 있는 곳이라 꼭 한 번은 순례해보실 것을 강력하게 추천 드리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