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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늬만 신앙인, 나는 진정 신앙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이 없네요.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12-22 조회수561 추천수0 반대(0) 신고

 

 

요즘 자주 하는 개인적인 묵상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이 책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새벽에 급한 일이 있어서 근 1년 만에 마산 외곽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아침 미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급한 용무라 어쩔 수 없이 광주 수도원에 대표 전화로 전화를 했는데 원장님이 받으셨습니다. 일반 신부님이 받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원장님이 받으셔서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급한 용무라 안부도 여쭙지 못하고 용무에 관한 이야기만 간단하게 했습니다.

 

일단 어젠 수도원에 미사를 봉헌하고 나서 오후에 원장 신부님께 폰으로 문자를 드렸습니다. 제가 수도원을 나온 후에 수도원에서 나온 사실을 제가 잘 아는 신부님께만 알려드렸는데 언제 수도원 수사님들이 궁금하고 또 저를 수도원에서도 응원을 했기 때문에 근황을 물었던 모양입니다. 또한 원장 신부님께서도 입회가 승낙이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통화를 했습니다. 축하한다는 전화를 주셨습니다. 마지막에 30분 정도 통화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의 성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때 원장 신부님의 성소에 관한 에피소드를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카르투시오 수도원이 국내에 있었다면 카르투시오 수도원을 지원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가르멜에 계신 걸 후회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시면서 부럽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더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삼천포로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는데 중간에 언제 제가 아는 신부님께 베드로 형제, 수도원에서 나왔느냐?”고 수사님께 물어보신 모양이었습니다.

 

처음엔 신부님이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하고 말씀을 드렸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시고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신부님이 원장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언제 직접 뵈면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새벽에 전화드린 내용과 또 안부를 여쭐 상황이 아니라서 그에 대해 이해를 구하는 문자를 보내드렸습니다. 문자에 대한 답장이 왔습니다.

 

지금은 광주에 계시지만 마산에서 원장님으로 계실 때 저를 자주 봐오셨기 때문에 저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시기에 아주 간단하게 문자로 위로와 격려를 주셨습니다. 아침에 미사를 봉헌하고 수도원에서 해야 할 용무를 다 보고 난 후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것처럼 마침 아침에 미사를 주례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청했습니다. 판공성사를 봤지만 그와 상관없이 청했습니다. 처음엔 급한 용무만 보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작년 여름에 오늘 주례한 신부님의 강론을 광주 수도원에서 아침 미사 때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약간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때 수도원에서 원장님의 배려로 23일 동안 수도원 내에 있는 통나무 집에 머물 수 있었기에 미사를 참례해서 듣게 된 것입니다. 그날 강론에 대해 제가 아는 신부님과 미사 후 오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서품 받으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부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신부님이 작년에 수도원인사 발령으로 마산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때 남아 있는 인상도 있고 해서 미사 후에 청했던 것입니다. 신부님은 저를 작년 여름에 수도원에서 잠시 머물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고 저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몰라도 대충은 누군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사를 개인적으로 봤습니다.

 

어제 미사 때 보니 지금은 아는 수사님 한 분과 또 제가 잘 알고 계시는 신부님 한 분 이렇게 계셔서 아는 신부님께 볼 수도 있었는데 그분께 그냥 한번 청해봤던 것입니다. 저는 성사를 볼 때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하고 성사를 봤습니다. 근데 예상 외로 신부님이 질문을 하시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고 그렇게 대화 형식으로 성사가 진행됐습니다. 처음엔 제가 신부님을 배려해드리는 차원에서 식사 후에 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근데 신부님은 아침 식사를 하시지 않으신다고 해서 별 상관없다고 하셔서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었습니다. 핵심적인 주제가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이틀 전에 올린 글의 주제와 같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였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난 후에 신부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정의였습니다. 저는 순간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이틀 전에 제가 올린 글의 주제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고해의 내용을 언급할 수가 없지만 신부님과 약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어제 제가 묵상한 내용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공유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금방 끝날 고해성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할까요? 만약 이런 질문을 대한민국에 계신 신부님들께 질문을 한다면 대답이 어떨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전수조사를 한 건 아니지만 일률적인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근 10년 동안 간혹 어쩌다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많은 신부님과 아니면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된 신부님과 많은 질문을 통해서 여쭤봐도 모든 분들이 다 각양각색 답이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제 경험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원론적으로라도 거의 동일한 답변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게 제가 어제 고해성사를 본 후에 묵상한 것에 대한 화두였습니다. 마침 요즘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묵상하고 있는 주제와 동일한 것입니다. 제목을 거창하게 말한다면 신앙생활과 성인입니다.

 

가톨릭 역사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크게 두 축으로 나누어보면 그 중에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또 누구는 목숨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 또 누구는 신앙을 배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신앙인이 존재해왔던 것입니다. ‘신앙인이란 무엇일까요? 그냥 사전적인 정의로 상상만 하면 신앙을 가진 사람 그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신앙인이기 이전에 우리는 아주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그 출발점을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한 시간 동안 성사를 보면서 나눈 대화의 가장 큰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평신도가 되었든 성직자가 되었든 수도자가 되었든 누구나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럼 이 말은 무슨 뜻일 것 같습니까?

 

신부님께서 고해성사를 통해서 말씀하신 내용을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예가 아닐 것 같아서 우회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건 누구나 하느님을 믿고 가는 사람은 그건 신분 여하를 떠나서 불완전하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는 지금까지 많은 수도자님들과 영적인 대화를 하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제도 신부님께서도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가령, 수도원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다양한 수도원에서 수도 체험을 해봤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도원 내에서 생활한다고 해서 다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일반 신부님들에게서도 많이 들은 내용입니다.

 

작년에 언제 한번 마산교구에 계신 어떤 신부님이 계신데 그 신부님과 면담을 하면서 그 신부님께서도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신부님은 교구 신부님이신데도 수도원 내부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모양 같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서막이 아주 길었던 것입니다. 지금 영적독서를 하면서 읽고 있는 책이나 요즘 묵상하는 주제랑 어제 고해성사를 보면서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모두를 단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하기엔 좀 어렵지만 저는 이렇게 압축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결론처럼 명제를 내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 세월 신앙을 해도 변화가 없는 신앙은 이름 없는 훈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한다는 것은 그 변화가 미미하더라도 변화가 있어야 그나마 신앙생활을 하는 보람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의미 있는 신앙생활이 될 수가 있는 것인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냥 세월만 무늬만 신앙생활을 한 것과 같은 모양으로 전락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또한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주옥 같은 성인들이나 교회에서 인정하는 고전과도 같은 성인들의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가 그 말씀이 너무나도 차원이 높다고 생각해서 엄두를 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상 우리가 성인이 된다고 하는 생각은 머나먼 꿈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 성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성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무수한 성인 성녀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성인 성녀들의 삻을 보면 몇몇은 천성적으로 은총을 많이 받으셨는지는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를 보면 많은 분들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제가 지금까지 많은 영성서적을 통해서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바로 부족한 인간의 나약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나약한 것을 자신이 인정하고 그걸 보완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의지가 보통의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제일 먼저 그분들은 자신이 바로 인간이라는 게 나약한 존재하는 사실을 철저히 자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성인 성녀들은 그 점이 바로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흔히 인간은 나약하다고 하는 말을 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분들이 인식한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그런 사실을 머리가 아니고 가슴으로 느낀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철저히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영적으로 진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신앙생활은 얼마나 오랜 신앙생활을 했는지 하는 햇수도 중요할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리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고 하느님을 믿었다고 해도 자신의 신앙생활이 신앙을 가짐으로써 변화가 되지 않고 단순히 몸만 신앙생활을 했다면 무늬만 신앙인이 될 수가 있고 성당 마당만 밟는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몇 년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름 없는 훈장만 달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를 운명입니다. 실제 그렇다면 그런 영혼은 참으로 불쌍한 영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될까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자신과 처절하게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지 않는다면 신앙을 가지지 안 했더라면 모를까 신앙을 가진 이상은 자칫 잘못하면 불쌍한 영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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