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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신앙은 영원의 세계를 희망하며 달리는 하나의 여정과도 같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12-31 조회수637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이 지나면 새해가 시작됩니다. 올 한 해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로 많이들 힘드셨을 겁니다. ‘신앙이라는 묵상주제를 가지고 하루 묵상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이것만 한 것은 아니고 끊임없이 쉴 때마다 틈틈이 한 것입니다. 수많은 영성학자나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도 있습니다. 저는 그 정의를 바탕으로 해서 제 나름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더 진지하게 묵상해봤습니다. 이건 어쩌면 저만의 개똥철학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단순히 어제 하루만 묵상한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생각을 했던 것의 결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앞으로는 그 결론에 조금씩 수정이 될 수도 있고 보완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앙은, 누군가 신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영원한 영혼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살기 위한 몸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지금 현세에서 단련하는 과정이 바로 신앙이고 그게 행동으로 표출되는 게 신앙생활이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현세에서도 부족하면 또 연옥에서도 단련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최종 우리는 하늘나라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가기 위해 우리는 이 현세에서 공부를 하고 연마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신앙이고 신앙생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각기 종교는 다르지만 그동안 집안이 불교 집안이라 유명한 사찰의 스님들의 법문이나 개신교를 다닐 때 요즘은 은퇴를 했지만 한때는 한국 개신교에서 이름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한 것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지금은 아빠스가 되신 야고보 신부님과의 개인 면담과 많은 수도원에 계신 수사 신부님들과의 대화를 하나로 통합하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야고보 아빠스 신부님이 수도원 응접실과 또 수도원 도서관에서 대화를 나눌 때 하신 말씀 중에서 지금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분들은 신앙이라는 것은 영원의 세계에 투신이라고 했습니다. 투신은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베드로 원장 신부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보면서 저는 우리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 또 사실 신앙인의 눈으로 봐도 저렇게까지 수도생활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많이 고민도 해봤습니다. 요즘은 중세시대도 아니고 세상이 변화가 되었으면 변화된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신앙생활도 그 정신은 최대한 살리면서 새로운 환경에 맞게 조금이라도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좋지 않으냐고 생각을 해도 될 법한데도 그분들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가를 수도원에서 묵상해봤습니다. 제가 고민한 결론은 그렇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 계속 타협을 하려고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런 타협이 처음 몇 번으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한두 번 하다 보면 사람은 이런 타협이 자기도 모르게 물리법칙에서 말하는 관성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속성을 계속 유지하려는 속성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되다 보면 나중에는 타성에 젖는 신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분들은 그걸 우려하고 경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인간의 그런 속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래서 원천적으로 그런 걸 미리 완전 차단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도 제가 단순히 그분들과 대화를 하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해 내린 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하면 좀 더 편한 수도생활을 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분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복 추구와는 정신 세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분들이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은 물론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 계시는 모든 수사님들도 개인적으로 보면 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약점이 없는 분은 한 분도 없으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보통의 우리와는 생각하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히나 저는 베드로 원장 신부님의 정신은 가히 존경의 수준을 넘어서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을 따르는 수도자의 모습으로 경외감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 경외감은 그분 자체에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하느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일반 우리와 같은 사람과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분도 나약한 인간의 몸을 비록 가지고는 있지만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화를 하나 소개해드리고 싶지만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라서 알려드리기가 조심스러워 이 자리에서는 그만 생략하려고 합니다. 저는 존경이라는 표현도 모지랄 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그렇게까지 그런 정신으로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려고 하는 모습은 왜 그럴까요? 바로 그분들은 단순히 그렇게 예수님의 모습을 잘 살아서 그냥 속된 표현으로 하늘나라 가셔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또 상급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오산이고 오판입니다. 저도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속에서 생활을 해보면 그런 게 아니라는걸 그냥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건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정답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극진한 마음과 그런 영혼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야곱 신부님의 눈을 보면 그분은 피부암이 걸리신 분이라고 나오는 분이십니다. 제가 처음에 갔을 땐 병원에 계셔서 안 계셨는데 나중에 오셔서 같이 미사 참례하고 또 기도를 할 때 보면 티브이 영상에서 볼 때와 같았습니다. 정말 그 눈빛을 보면 제 영혼이 쓰레기 영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원주 교구 신부님께 초대 원장님으로 오신 장 폴 신부님의 인상을 말씀드렸습니다. 폴은 바오로 세례명입니다. 영어식 발음입니다. 이 분을 보면서 제가 마치 하느님을 가까이 보는 것 같다는 찬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그런 기도 생활을 하셨으니 하느님의 신성이 녹아들어 가셔서 그럴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실 다큐에서도 봤지만 제가 처음으로 그분을 뵈었을 때 수도복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 수도원에 간 날이 월요일이었고 그날이 산책하는 날이나 공동체 모든 분들이 산책을 가셨고 신부님은 이제 연로하신 관계로 수도원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를 안내하려고 나오셨을 때 저는 충격이었습니다. 수도복 전체가 다 조금씩 조금씩 수도복 천으로 덧대어 누더기와 같은 수도복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수도복이 정말 하늘나라의 빛나는 훈장보다도 더 빛나는 훈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장 폴 신부님은 다음에 그 수도복을 입고 하늘나라에 가실 겁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그 수도복은 하늘나라의 그 어떤 훈장보다도 더 빛날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들처럼은 살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봤을 땐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수도원과 연락할 일이 있었습니다.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님이 한번 테스트를 하시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오신 신부님이라고 하시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테스트에 들어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정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봤을 땐 그냥 그 수도원에서 사셔도 충분하실 텐데도 인간적으로 보면 수도원 중에서도 최고의 극빈한 수도원을 자진해서 가시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바보입니다. 하지만 성공 여부를 떠나서 그분은 단순히 이 세상만을 바라보신다면 절대 그런 곳에 한 번이라도 가실 마음을 먹지 않으셨을 겁니다. 바로 그분은 영원의 세상을 꿈꾸고 계셨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도 영원의 세상을 꿈꾸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영원의 세상과는 그 세계에서도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도 하루 세끼 밥을 먹어도 다 같은 수준으로 밥을 먹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의 세상에서 다음에 살게 되더라도 이 세상에서도 구분이 되듯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례 모두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그분들의 삶과 정신 속에는 물론 인간적인 생각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적인 이해타산과도 같은 계산을 해서는 절대 누구든지 그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 언급했던 올리베따노에 계신 야고보 아빠스 신부님의 말씀과 카르투시오 수도원 베드로 원장 신부님, 또 장 폴 신부님 같은 사례 모두입니다. 베드로 신부님은 스페인에서 요즘 말하면 왕족 출신입니다. 출신 성분도 대단하십니다

 

장 폴 신부님도 프랑스에서 최고의 수재들만 나오는 대학을 나오셨고 아버지께서도 대학학장이십니다. 집안 가문도 대단하십니다. 그 두 신부님만 보더라도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도 있는데 어쩌면 인간적인 생각에는 쌩고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이분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보면 신앙과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제가 서두에 언급하신 내용이 이해가 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이 현세를 보지 않으시고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에서 사실 것을 희망하는 삶이 우리가 해야 하는 신앙의 삶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정말 잠시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영원을 바라봐야 할 겁니다. 그곳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냥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와 같은 영혼이 될 것입니다. 시간은 흐르면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을 앞으로 만나게 될 시간이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하느님의 심판대 하면 겁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심판대의 시간이 영광의 시간으로 다가올 것이고 누군가는 치욕의 시간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성적표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가 치욕의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답이 나올 것입니다. 새해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분들 가정에 풍성히 내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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