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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03 조회수501 추천수2 반대(0) 신고

1독서<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항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을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4,16에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정의한다. 이는 필자가 하느님의 정체를 들여다보고 내린 정의가 아니다. 오히려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하느님을 직관하는 양 으스댄 듯한데, 필자는 본론을 펴서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뵙지 못했다고 단정했다. 그럼 무슨 근거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를 내릴 수 있었나? 하느님이 예수의 강생과 대속적 죽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 사랑을 드러내신 사실들을 체험하고서 내린 정의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무정한 분이라면 어찌 사랑을 드러내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하느님의 본질을 적시하는 정의이기도 하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에 관해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사랑을 체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형제애를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기만 해선 안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애를 사랑하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과 고백하는 이들은 서로 내주하게 된다. 마찬가디로 사랑을 실천하면 하느님과 사랑하는 이들은 지금 서로 내주할뿐더러 장차 심판날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17)

 

9

9절에서는 하느님 아들의 강생을 논한다. 하느님의 아들을 수식하여 외아들이라 한다. 욘하계 문헌에선 하느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 하고 공관복음에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한다. 두 수식어 모두,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는 극히 독보적이라는 뜻이다. 9.14절에 나오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이다.

 

10

10절은 예수의 죽음을 대속사건으로 본다. 아울러 이 사건은 하느님 사랑의 발로라고 풀이한다. 요한 1서의 경우 1,7:2.2: 3.5.16: 4.10에 대속신앙이 나타난다.

 

 

 

 

 

 

복음<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4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이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방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34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는 본디 34절부터 시작되었으리라. 그런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동기를 들어 8,2에서는 그들이 ...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하고 여기서는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이다한다. 구약성서를 보면 야훼는 목자시다. 모세는 목자 같은 지도자를 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청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대부분 목자처럼 처신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참 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제 참 목자 예수께서 오셔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

 

마르코는 예수의 가르침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37

농촌 일꾼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다(마태20.2).

 

39

사막에 푸른 풀이 있다니 뜻밖일지 모른다. 사화의 전승자는 푸른 풀밭에 이 몸 뉘어주시고... 상을 차려주시고”(시편 23.2.6)를 연상했을 것이다.

자리잡다는 직역하면 눕다. 유다인들은 회식 때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한다.

 

44

마태 14.21; 루카 9.14에서는 오천 명 가량이라 한다. 그리고 마태 14.21에서는 여자들과 어린이들 외에라는 단서를 덧붙인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오늘의 복음에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주인이 먹는 식량이냐 아니면 빵을 뗄수록 계속 나오게 한 것은 아닐까하며 정말 모르겠다는 말들을 합니다, 여기에서 오천명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것도 장정들말고도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봉헌도 않하고 그냥 말씀만 듣고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봉헌하고 그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보면 기적이 아니라구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유다인과 이방인등 여러곳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한번 먹여주시죠.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사람들에게 무엇무엇을 가지고 와라 또는 먹을 것을 가지고 와라 하는 통보를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무려 만명정도의 사람들에게 며칠간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수 있게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목자도 없는 사람같이 지쳤으며 배고픔은 얼마나 불쌍하였겠습까? 며칠간을 배를 졸졸 굶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엇으로건 어찌해서건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전해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는 어린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가두었던 우리 성인, 성녀들에게는 여러 가지의 형벌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주지않고 내려벼 두는 배고픔이 제일 견뎌내기 어렵다고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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