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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은 그냥 빵이 아닙니다. 눈물의 빵입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04 조회수860 추천수1 반대(0) 신고

 

 

흔히들 말합니다. 사랑은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있다고요. 많은 사람은 주는 사랑이 더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랑은 받는 사랑도 아름답다고 합니다. 사람은 보통 보면 받는 사랑을 더 원합니다. 이걸 유전자 학문에서 보면 소위 말해서 인간의 유전자 속에 그런 게 있다고 합니다. 홍성남 가톨릭 영성 상담소 소장님을 맡고 계신 신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주는 사랑도 좋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사랑은 받아봐야 사랑을 할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 말씀도 맞습니다. 사랑이라는 관점은 누구의 입장과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런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시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는 어떤 사랑이 먼저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저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저 사랑한다와 같이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말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도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그건 낮은 단계의 사랑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아름다운 사랑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감성적인 이야기만 같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이건 학문적이라고 표현하긴 그런데 많은 세월 학자들이 연구를 해 보면 그렇다고 합니다. 그건 최첨단 기계라도 그걸 감지하기는 지금까지의 기술로는 힘들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만이 영혼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좀 더 세분하면 조금 다릅니다. 독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죄를 없애주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속죄 제물이 사랑이라면 이 사랑에는 무엇이 있나요? 바로 피를 흘리는 희생과도 같은 사랑입니다. 제물은 바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만 하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이게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아름다운 사랑의 극치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또 다른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기적을 빵의 기적에만 초점을 맞추는 걸 많이 봤습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좀 더 다른 관점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결과는 빵의 기적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빵의 기적의 시발점은 어디서 출발을 하였는지 저는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배고픔은 육적인 배고픔도 있겠지만 영적인 배고픔도 있습니다. 육적인 배고픔은 그냥 식량으로 배를 채우면 되는 그런 배고픔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배고픔은 배만 고프지 않다고 해서 배 고프지 않는 게 아닙니다. 육적으로는 배가 부르지만 영적으로는 배 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육적인 허기만 채우면 그들은 더 이상 그런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서 오는 배고픔은 바로 영적인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갈망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인 생명의 물과도 같은 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배도 고픈 것도 있지만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 다음에 하신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 말씀 다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해보시면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실 때 단순히 육적인 배고픔만을 보신 게 아니였습니다. 이미 이때의 시간은 요한이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아셨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연결해서 예수님의 상황을 묵상해보면 답이 바로 나옵니다. 요한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바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자기는 빛이 아니고 단지 빛을 증언하러 왔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 죽게 된 것입니다.

 

요한의 존재는 바로 그때 그당시 군중들에게는 목자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빛을 증언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신원만을 밝히는 역할로서만의 역할은 아닐 것입니다. 이 증언의 삶은 바로 자신이 그들의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바로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삶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그런 역할을 할 목자를 잃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눈은 그 군중들이 더 가엽게 보이셨었지 않으셨을까 하고 묵상합니다. 그건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게 여기셨을 테고 또 다른 예수님의 근심이 있으셨을 겁니다.

 

바로 목자 없는 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앞으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될 운명이 되시기 때문에 미래를 보시더라도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을 겁니다. 이렇게 묵상한다면 오늘 복음은 최후의 만찬 예식의 예비 모형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에 들어간 빵이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드린 제물이었습니다. 그 제물이 바로 단순히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이었을까요? 그건 단순한 빵이 아니였을 겁니다. 그 빵이 바로 예수님 당신의 몸이셨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빵은 단순한 빵이 아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쳐서 피를 흘리게 되는 당신의 육신을 상징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바로 그 육신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시기 위해서 오늘 독서 말씀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그게 바로 저희를 위해 당신 스스로 제물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당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몸이라고도 생각을 해야 하지만 그저 단순히 몸이라고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빵이 되어 오신 그 의미가 조금은 희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그 몸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이 '희생제물이 되신 몸'이라고 생각해야 당신의 그 희생으로 우리를 살리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그 사랑을 그냥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과도 같은 죽음으로 저희가 내몰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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