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라기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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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2-01-05 | 조회수53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2. 1. 5. (공동번역)
(2)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라기1,2-3)
“2 '나 야훼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였더니, 너희는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 구나. 내 말을 들어 보아라. 에사오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런데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3 에사오를 미워하였다. 에사오가 살던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고 대대로 물려주던 땅을 빈들로 만들었다.”(1,2-3)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사자(使者)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영적인 무거운 부담을 주는 경고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고 했다. 경고를 하신 것은 하느님의 엄숙한 저주와 심판의 의미를 뛰고 있지만 자기 백성을 모든 불의한 데서 돌이키게 하려는 하느님의 간절한 뜻과 사랑의 음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예언자를 통해서 자기백성들의 신앙(信仰)개혁(改革)으로 인한 좋은 변화와 삶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副應)하는 교회(敎會)가 되고 성도(聖徒)가 되어야 한다.
첫째 진술(眞術):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말라기서는 기록한 내용의 구성 형식이 다른 책보다 특이하다. 문답식 형식으로 해서 말씀하시는데 문제 제기도 하느님께서 하시고, 이에 이스라엘의 답변도 그들의 신앙 삶을 종합하여 결론을 얻어 하느님께서 답변하는 형식이다. 이 형식의 말씀에 유의해야 할 단어로는 “어떻게, 어찌”라는 강조적인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음을 접할 수 있다.
1)하느님의 진술을 살펴봅시다.
“나 야훼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였더니,(1,2)”고 하셨다. 참으로 정감이 풍성한 하느님의 자애로운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이 있기 전보다 더 오래된다. 하느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또 은혜스럽게도 이스라엘을 택하여 자기 소유물을 삼음으로 그 사랑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사랑하다”는 히브리어로 ‘아하브’로써 하느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써, 70인 역에서는 ‘아가페’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너희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가슴 벅차고 감동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온 땅에 크시고 영화로우신 분이,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펼쳐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의 놀라운 애정고백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음성을 들어보았는가? 그리고 느끼고 감동하여 보았는가? 하느님께서 말라기 예언자를 통해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그 기본과 바탕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비록 불의와 타락의 죄악을 책망하고 경고하는 두려운 말씀을 하신다고 하여도, 하느님은 넓은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먼저 대하시기를 기뻐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문귀는 완료형이 아니라 미완료형으로써 지금도 계속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일회적이거나 과거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하는 진행형임을 알아야 한다. * “하느님은 그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실증해 보이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돌아가실 때 하느님은 세상을 향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하신 것이다.”
2)하느님의 진술에 대한 백성의 반박(反駁)과 질문(質問)
1,2절에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였다. 불경건한 이스라엘은 아주 반항적인 투로 거칠게 반박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랑한다.”는 말씀에 시큰둥하면서 회의적이고 불신함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불만적(不滿的)인 이 반박(反駁)은 현실적인 현 상황을 대조해서 “어느 점에서, 어떤 일을 두고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고 답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답변과 말투 속에서 우리는 당시 백성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냉랭한 차가운 신앙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을 깨달아 감사하면서 희생과 헌신과 봉사가 결여되어 있는 심각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러한 불만을 가진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하고 성전을 재건한 후에 그들이 기대했던 만큼 번영과 축복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원성에서 나오는 반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실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무지(無知)와 불신(不信)이 가득하여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은 오늘 우리 신자(信者)에게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불만이고, 의문이고 의식들이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였고, 하느님을 위해서 할 만큼 하였는데 하느님은 우리(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나를 부(富)하게 않게 하고, 병(病)들게 하고, 매사의 일들을 흥(興)하고 형통(亨通)하도록 되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말씀에 과연 그리합니다. 아멘하고 할렐루야!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과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는 왜 이렇게 현격한 차이가 있는가? 누구든 한편이 잘못이 아닌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거짓이라는 말인가?
3)자기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證明)함
이 증명은 하느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한 것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지엽적 문제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근본, 그 근원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⑴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을 사랑하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품고 있는 회의와 불신을 제거하기 위하여 한 예를 들어서 말씀하시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은 이사악의 큰아들 에사오의 후예가 아니라 둘째인 야곱의 후손들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둘째인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2절에서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를 미워하였다.”고 했다. 정상적 순서로는 형 에사오를 사랑하셔야 했는데, 하느님께서는 에사오를 버리고 야곱을 사랑하신 것이다.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은 ①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사랑이다. 하느님이 야곱을 사랑한 것은 어떤 인위적인 조건을 쫓아 사랑한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들의 선조인 야곱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것이다. 로마서9;11절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무조건 사랑하는 하느님의 무궁한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수천년을 지내온 역사 중에서도, 또한 어떠한 강대국 앞에서 망하지 않고 이스라엘은 살아남았고 이제도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이 서있는 이 시온의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하느님께서는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은②서열을 무시한 특이한 사랑이었다. 당시의 사회 불문율은 장자의 서열을 아주 존중히 여겼고, 깨어질 수 없는 견고한 철칙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은 형 에사오가 분명히 존재하여 있고, 그가 축복을 기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아버지 이사악이 형 에사오에게 축복을 다 부어주시려고 한 명백한 의도가 있었는데도, 장자(長子)권의 축복은 누구에게 주어졌느냐? 사람의 변칙을 통하여 자신들의 선조인 야곱에게 다 주어졌고 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야곱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특은(特恩)이요, 큰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느나님께서는 전에도, 이제도 이후에도 너희를 사랑하노라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⑵야곱의 형 에사오는 미워하셨다는 것이다. 에사오는 이사악의 장남이다. 야곱의 형이기도 했다.
①하느님의 미움은 어떤 것인가? “미워하심”이라는 말에는 감정적인 증오도 담겨있는 뜻이지만, 이 단어의 진정한 뜻은 2절에 언급된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개념을 지닌 단어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주권적 선택에서 제외되어 버림받은 것을 말한다.
②장자(長子)의 축복(祝福)을 빼앗기고 잃은 것은 어떤 표인가? 형으로써 자연적으로 주어진 장자의 권을 다 빼앗긴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함이요, 미움 받음의 표(表)를 뜻하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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