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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07 조회수719 추천수3 반대(0) 신고

1독서<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14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며,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 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4

14절에선, 하느님의 뜻대로 청하면 청허하신다는 확신을 피력하는데, 같은 내용의 확신이 3,21-22에도 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해야지 우리 욕심대로 청해선 안된다는 가르침이 마르 14,36; 야고 4.3에 나온다.

1요한 3,21-22: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으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앞에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르 14.36; “아빠 아버지, 당신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뜻하는 대로가 아니고 당신이 뜻하시는 대로 하소서,”

야고 4.3: “여러분은 청해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쾌락에 낭비하려고 잘못 청하기 때문입니다.

 

15

15ㄴ절에서는, 지난날에 교우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청해 은혜를 받은, 기도 체험을 회상시킨다. 같은 내용의 말씀이 마르 11.24에 있다. “여러분이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모두 받는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16

16-17절은 청도에 관한 두 가지 훈계다. 요한계 교우들이 어쩌다 죄를 짓거든 대신해서 용서를 비는 청도를 드리라고 한다. ? 교우들이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니 하느님이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이다. 풀이하면 교우들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배반하는 영지주의 이단죄, 영원한 죽음에 이를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니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영원한 죽음에 이를 죄를 지은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위해서는 용서를 비는 청도를 드리지 말라고 한다.

 

필자는 영지주의 이단자들과 그리스도 신앙을 두고 혈투를 하는 상황에서 이런 모진 말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단자를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인사하지도 마십시오. 그에게 인사하는 이는 그의 나쁜 행실에 동조하는 것입니다”(2요한 10-11)라고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예수께서도 세상을 위한 청도를 사양하셨다: “세상을 위해서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을 위해서 청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8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지켜 주시는 까닭에 악마가 범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0

20ㄱㄴ절: 세상은 비록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지라도(19)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확신한다. ?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지난날에 오시어 참되신 하느님을 알려주셨고, 지금 하느님과 예수의 품안에서 나날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20ㄷ절: “이분은 참되신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본래의 요한복음 필자는 시작(1,1.18)과 끝에서(20.28) 예수를 하느님이시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요한 1서 필자도 시작(.12)에서 예수를 영원한 생명이라 학, 끝에서(5.20) “참되신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께 드린 지고한 존칭이다. 신약성경을 통틀어 요한복음과 요한 1서에서만 나오는 극존칭이다.

머리말(1,1-3)과 맺음말(5,20)은 어휘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닮았거나 같다.

 

21

21절의 우상들은 그리스도(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과 형제 사랑을 저버린 영지주의 이단사상 또는 그 이단자들을 가리키겠다.

 

 

 

 

 

 

 

 

복음<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

이 대목은 예수에 대한 세례자의 마지막 증언이다. 이 증언은 우선 예수의 활동(세례) 가운데 이루어진 점이 다른 증언이나 공관복음에 보도된 증언(마르 1,2-8)에 비해 독특하다. 공관복음에서는 세례자가 감옥에 갇힌 이후 예수의 활동이 시작되는데, 여기서는 예수와 세례자의 활동이 장소만 다를 뿐 동시에 펄쳐지며(22-23) 세례자가 갇히기 전의 상황이다(24). 예수의 활동이 세례자의 제자들에게는 불만이었지만(25-26), 세례자에게는 오히려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계기가 된다(27-30).

 

22

유다 지방 어느 한 마을을 가리킨다.

세례자는 요르단 강 동편에서, 예수는 서편에서 세례를 베푼 것으로 말들 하지만,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았을뿐더러 함께 세례를 베풀지도 않았으리라 추정된다(23절 참조).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는 보도가 전혀 없고 다만 예수가 세례자의 세례를 인정한 보도나 부활 후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의 명령만 있다. 한편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고 보도하면서 다른 한편 예수 친히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풀었다고 한다(4.2).

 

만일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면 세례자의 세례와는 분명히 다른, “회개의 세례”(마르 1,4)를 능가한 세례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면 세례자의 제자 중 어떤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도록 세례를 베풀었을 것이고, 예수는 다만 그것을 허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령의 세례는 예수 부활 이후에 비로소 베풀어졌다.

 

23

세례자 요한의 활동 목적과 그 의의를 시사한다. 세례자는 메시아을 위한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유다 지방 어느 곳, 즉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중요한 곳에서 예수가 활동할 장소까지 배려했다.

 

24

예수가 아직 공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설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25

세례자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동기를 시사하는 저자의 설명이다. 예수가 행한 세례를 지켜본 어떤 유다인이 예수의 세례와 세례자의 세례를 두고서 어느 세례가 더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아마도 세례자의 제자들에게 더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아마도 세례자의 제자들에게 논쟁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쟁점은 세례가 아니라 정결례에 모아져 있다. 이 쟁점의 주제는 세례자의 제자들 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원문에는 시사되어 있다.

 

정결례는 유다인들의 몸씻는 예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쟁점의 관건은 사람들의 정화이고, 예수의 세례와 세례자의 세례가 어느 정도 내적으로 정화시켜 죄를 씻는 힘이 있는지에 문제가 제기되어 논쟁이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죄의 정화는 세례에 관련된 초대교회 용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세례자의 추종자들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대결 또는 논쟁적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6

세례자의 제자들이 예수의 세례행위와 그 성과에 대해 자기네 스승에게 하소연한다. 인간적 질투와 함께 아직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27

하느님이 사람들을 이끄는 힘을 주시지 않았다면 예수는 그런 성과를 얻을 수 없었으리라는 뜻이다.

 

28

세례자의 제자들이 오히려 자기네 스승의 증언 내용에 대한 증인으로 언급됨으로써 세례자의 정체와 사명이 분명해진다.

 

29

신랑은 그리스도를 신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신랑의 친구는 세례자를 가리키는 은유다. 특히 그리스도와 세례자의 관계가 당시 결혼 풍습에 따른 신랑과 신랑 친구의 관계로 비유됨으로써 더욱 구체화한다. 신랑 친구는 신부를 데려가는 두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는 신라와 신부의 첫날밤을 신부 대기실에서 지켜보다가 신랑이 신부의 처녀성을 인정하고 기쁨의 환성과 함께 신부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신랑 친구도 신랑과 함께 기쁨을 나눈다. 신부는 신랑에 의해 처녀로 인정되며, 그 인정은 곧 신부가 처녀로 보장한 신뢰에 대한 확인이다. 세례자는 자기가 증언한 예수와 함께 나누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이와같이 신랑 친구가 신랑의 환호성과 함께 맛보는 기쁨으로 비유한다.

 

30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필수성을 시사한다. “커지다작아지다는 활동의 힘과 영향력에 관한 표현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의해 세례자의 임무나 활동은 이제 끝나가고, 예수로 인해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펼쳐진다는 것을 뜻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예수님을 "임자"로 까지 부르셨습니다.  충청도 양반이 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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