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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세례 축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09 조회수1,011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도 없으신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설명한 것을 봤습니다. 저는 그 수준이 아주 난해해서 그냥 평범한 수준에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도 공생활을 하시기 전에는 철저히 하느님의 신성이 인성에 가리워졌을 것 같습니다. 때가 되어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실 시간이 다가와드디어 세상에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절차가 필요하셨을 것 같습니다. 

 

원론적으로 보면 세례라는 것은 죄를 씻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최초의 관문이 바로 '세례성사'입니다. 옛 사람의 본성을 씻고 다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세례를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세례자 요한에게 가시어 받으려고 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배제하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제가 그 수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신성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인성도 또한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성조차도 공식적인 절차로 죄를 씻어내시기 위해서도 그럴 것이고 또한 예수님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하느님의 겸손입니다. 원천적으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당신 스스로가 철저히 인간 세상 안으로 당신의 몸이 육의 옷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육 그 자체가 이미 죄인의 몸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철저히 하느님이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걸 보여주시는 측면도 있을 거라 추측이 됩니다. 이보다도 더한 겸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셨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부탁하셨을 겁니다. 이미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예언자였기에 그랬을 겁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또 하나의 만남을 보게 됩니다. 겸손과 겸손의 만남입니다. 하느님의 겸손과 세례자 요한의 겸손입니다. 처음엔 거절을 했지만 예수님의 뜻에 순명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다 겸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 어느 한 쪽에서도 겸손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세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요한은 이미 세례를 주는 권능에서도 자신의 권능과 예수님의 권능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능력은 성령과 불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신성을 알았던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랬기에 그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봤지만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뭔가 조금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신발 끈을 풀어드리려고 하려면 예수님 발치 가까이 자신의 몸이 다가가야 합니다. 자신의 몸은 죄의 본성을 가진 몸이라 신성을 가진 예수님의 몸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묵상해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게 되면 완전히 인성이 없어진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럴 것 같습니다. 이런 면을 깊이 묵상해본다면 우리가 정말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단순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형식적인 절차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도 세례를 받는 그 순간은 어떤 몸으로 변하게 되었는가를 잘 보게 되면 그 순간만은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우리였습니다. 근데 시간은 지나면서 우리의 신원은 어떻게 변화가 되어 가는 것일까요? 돼지가 진흙탕을 구르며 더러운 줄 모르고 나뒹구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는 다시 죄의 굴레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렇습니다. 

 

이건 단순히 죄를 짓는 생활을 한다고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은혜를 망각한 처사이며 또 다른 면은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한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고해성사라는 성사를 통해서 다시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해성사와 세례성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사이지만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고해성사가 단순히 죄를 씻는 성사의 차원을 넘어서 또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해 주는 의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세례의 효력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묵상해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법처럼 취소는 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일단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인호가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건 세례를 받았다는, 하느님의 자녀로 승인됐다는 하나의 증명이지 그게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걸 보장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건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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