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람은 어디서 살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마르1,14-20)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10 조회수689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하늘의 존재로 부활할 것인가, 땅의 존재로 흙으로 돌아갈 것인가

사람은 어디서 살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마르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구약이 끝나고 신약의 시작이 되는, 곧 율법의 실체, 그리고 요한이 예고했던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마태3,2) 또한 회개(메타노이아)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라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구원이 없는 생활방식에서 돌아서서 구원의 진리의 삶으로 오라는 말씀이다.

 

(1베드1,18-19)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 율법 안에 하느님의 구원의 진의(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뜻을 위한 법으로 지켜왔던, 그래서 그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속이는 헛된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돌아오라는 것이다.

 

(에페4,21-24) 21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돌아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 창조의 하느님의 모습으로 회복이며(창세1,27) 그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길이 구원의 진리임을 믿는(입는) 것이 거룩과 의로움의 하늘의 새 인간인 것이다.(로마3,24 히브10,10참조)

 

(2코린3,14) 14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각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옛 계약(율법)을 읽을 때에 그 *너울이 벗겨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율법의 제사와 윤리, 그 모든 것의 실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 진실을 못 보는 이들이 많은데, 뱀의 유혹을 먹은 아담의 죄, 선악의 논리가 역사를 따라 흘러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는 너울(수건)이 되어 인간의 뜻 지혜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 ‘메타노이아, 회개’다.

내 뜻, 내 생각의 삶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으로 오는 것, 회개다. 죽음으로 끝나는 땅의 삶에서 돌아서서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삶으로 오는 것, 회개다.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그 모습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일이 곧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일을 해서 양식을 얻어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이 땅(육)의 사람이다. 그렇듯, 성경에서 ‘참 양식을 찾는일’을 해서 먹는 것이 영의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풍랑이 이는 호수의 삶, 그 고달픈 삶의 사람들에게 그물을 던지는, 곧 하느님나라의 양식인 하늘의 복음,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배(교회)- 옛 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그 하느님의 바른 가르침을 주어 고쳐주는 것, 그 예수님의 뜻으로 보시고 곧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 하느님 나라의 일을 했던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 하늘의 일을 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너무 서둘러서 오늘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안된다.

오늘  복음묵상의 가르침-‘우리도 제자들처럼 모든 두려움, 걱정, 인간적인 나약함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복음의 삶을 살아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그들이 언제 예수님 기준으로 살았던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던 그 자리에서까지 자신들의 욕망, 뜻을 드러냈던 제자들이다.(마태20,21-24참조)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들 도망갔던 제자들이다. 그런데 누구를, 무엇을 본받자고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께서 옛 방식에 젖어 고달프고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나라 생명의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에게 쉼(안식)과 평화를 주는, 그 고쳐주시는 일은 예수님 혼자 하셨다.

일은 예수님 혼자 다 하시고 그 일에 제자들을 그냥 동참시켜 주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일인 것이다. 하느님의 재창조 일에 피조물인 인간들이 함께 하는 것이니 어떻게 은혜롭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제자들이 ‘벌고 따랐다’한 것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닌 ‘버린 척’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죽음) 그 배를 다시 찾아서 고기 잡으러 갔지 않은가(요한21,3)

우리는 그 철없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곧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예수님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만으로 ‘제자들을 본받자’하는 생각이 바로 인간의 뜻, 그 너울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인간의 뜻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진다고 하셨으니 그 인간의 지혜를 벗고, 성경의 모든 인물들, 사람의 불가능을 보고 그 모습이 ‘나 자신의 모습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으로 실행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하늘의 사랑을 적어놓은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그 사랑을 내가 받아 전하는 것, 큰 계명의 실천이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셔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옛사람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 예수님을 기준 하는 삶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목숨 바쳐 전했듯이, 성령을 청하고 그분의 이끄심을 받아야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올바른 진리의 신앙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불가능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지혜)을 깨닫고자 하는 그 갈망하는 마음이 시작일 것이다.

 

(지혜6,11-13) 11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성령님! 우리 모두가 당신을 갈망하게 하소서~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