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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13 조회수810 추천수2 반대(0) 신고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역사책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 다른 표현은 이스라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도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한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를 지향하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하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인간의 역사와 이건 공통점입니다. 그외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는 다른 이유도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사례도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인간의 역사이든 사람의 역사이든 교훈과 경종은 조금 성질을 달리합니다. 얼핏 보면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은 차이가 납니다. 

 

교훈도 하나의 경종이 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강도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역사가 남기는 어떤 교훈이 있다고 해도 그 교훈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그런 상황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인식을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나간 하나의 역사로서만의 가치가 있고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다는 인식 때문에 그런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경종은 하나의 경고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를 지나간 하나의 역사로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예언자와 같은 말처럼 예언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역사적인 내용이 있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단초로서의 역할은 이것만 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이런 관점을 배경으로 해서 오늘 복음을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줄거리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치유 기적으로 낫게 되어 환자에게 예수님께서 단단히 일러주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것을 말씀하십니다. 근데 사제에게는 하나의 증거가 되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강조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환자는 이런 사실을 널리 알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유명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외진 장소에서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됩니다. 복음에는 '그래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방에서 예수님께 모여들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백 번 양보해서 설령 예측을 할 수 없으셨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부도난 수표가 아닐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낭중지추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듯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사실 잘 곱씹어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라는 말 때문에 뭔가 자신이 나팔을 불어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된 판단입니다. 형태는 스스로 자발적인 모습을 취하긴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끝이 뾰족하기 때문에 당연히 돌출될 수밖에 없는 형상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기려고 하신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드러내지 않으시려고 하셨지만 그런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론적으로 보면 드러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생색을 내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상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한 의도는 말하지 말라고 해도 그 환자가 그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사자성어 낭중지추와 연결해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묵상합니다. 우리 보통의 사람은 선이나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나면 그걸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세상에 자신의 행위가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도 예수님의 이런 점은 닮아야 하는 하나의 교훈도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하나의 교훈으로 그칠 게 아니라 하나의 경종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또한 한 가지 더 묵상한다면 세상에는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걸 하나의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걸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걸 당신께서 하신 치적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이중 인격자의 속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건 당연히 아니겠죠. 그럼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증거가 되게 하라는 뜻은 어떤 뜻일까요? 사실 제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는 잘 모릅니다.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묵상입니다. 저는 이게 서두에 제가 말씀드린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본다면 예수님의 그 모습은 단순히 당신의 치적을 인간처럼 드러내시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교훈으로 세상에 전하시기 위해서 일 겁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역사의 한 단면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증거'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여러 다양한 것을 묵상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도 많겠지만 가장 핵심은 선을 행하는 것 외에도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보다는 정말 하느님만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해도 충분히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결과는 하느님만 아실 수도 있지만 저는 진실로 그런 의도가 백프로라고 한다면 자신이 드러내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낭중지추의 사자성어가 말해주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드러내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제가 하느님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하느님이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인간인 저 역시도 그런 마음인데 하느님께서는 두말 해야 무엇하겠습니까? 

 

오늘 복음묵상의 결론을 단 하나의 표현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선을 행하고도 선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 선행은 단순히 하나의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선행으로 하늘나라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 세상에 남기는 역사는 인간 세상에만 남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언젠가 영원의 세상에서 보면 사라지는 역사이지만 우리는 멀리 바라본다면 영원한 영원의 세계에서 영영세세 무궁토록 남는 선행으로 하늘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으려면 굳이 제가 결론을 내지 않아도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게 잘 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고 영원을 갈망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지금 받는 어떤 명예도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명예라면 모를까 단순히 인간적인 욕망 때문에 명예를 추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자기가 받을 상이 아주 초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나라에서 받을 큰 상을 생각하고 영원히 남을 영광을 생각하며 이 세상을 산다면 그처럼 영예로운 삶도 없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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