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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은 왜 죄인들과 어울리셨을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15 조회수637 추천수1 반대(0) 신고

 

 

마중지봉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삼 밭에서 나는 쑥이라는 뜻입니다. 약간 구부러진 쑥이 삼 밭에서 자라면 삼이라는 뻣뻣한 성질 때문에 곧게 자랄 수 있다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환경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근묵자흑은 정반대의 개념이 될 것입니다. 이건 나쁜 환경 속에 있으면 나쁜 물이 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유유상종은 속된 표현으로 '끼리끼리' 모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오늘은 고사성어를 바탕으로 해서 한번 복음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마중지봉의 고사가 말하듯이 삼과 쑥은 전혀 같은 과의 식물이 아닙니다. 원래 유유상종은 좋은 인재들은 좋은 인재들과 함께 교류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속뜻이지만 오늘날은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끼리끼리'이지만 실제 아주 미세한 차이는 긍정적인 집단에서 부정적인 집단을 바라보며 '배타성'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그런 미세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삼과 쑥을 한번 비교해서 보면 어떨까요? 삼 밭에 쑥이 적응한 것입니다. 즉 전혀 다른 환경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쑥이 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의 근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모습이나 자세가 변화가 된 것입니다. 쑥은 부드럽고 약간 처지는 모습이지만 삼은 뻣뻣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개념으로 이 현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나 식물이나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다만 그 환경이 좋은 환경이냐 좋지 못한 환경이냐에 따라 피지배 환경이 어떻게 변화느냐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또한 그럴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설령 그런 환경에 놓여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변화려고 하는 의지가 없으면 그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율법학자, 바리사이, 세리와 죄인입니다. 오늘 등장인물 중에서는 죄인이 무엇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어떤 죄인이라고는 명확하게 제시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세리는 하나의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다만 그당시 그 직업의 속성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죄인이라는 그런 개념입니다. 

 

등장인물을 삼각관계로 설정해보면 예수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세리와 죄인 이렇게 관계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관계, 세리와 죄인과의 사이에서 오는 관계 둘 다 유유상종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은 전혀 신분이라든지 속성 면에서 보더라도 어울릴 수조차도 없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이 그들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바라봅니다. 과연 그럴까요? 

 

복음을 잘 읽으보시면 반대입니다. 15절을 보시면 그들이 먼저 예수님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자리는 함께했지만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마치 쑥이 삼 밭에 들어간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실상 예수님의 환경 속으로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당신 스스로가 얼마든지 배척하면 배척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를 못하시는 것처럼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의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한번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어울렸다고도 불 수 있지만 이 어울림의 과정은 바로 단순히 인간 사회에서 우리가 말하는 '사교'가 아니고 '치유'의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사에 비유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은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병든 이로 비유가 됐기 때문에 죄인을 단순히 죄인이라고 바라보는 시각보다는 '병든 이'로 보신 것입니다.

 

의사는 환자를 치유해야 하는 게 자신의 본분이고 속성입니다. 원래 사람은 같은 현상을 가지고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각은 왜 그런 시각으로밖에 볼 수가 없었을까요? 이미 한번 고정관념으로 자리잡혔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그들을 죄인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다면 자신들 스스로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이미 그들 스스로가 남을 단죄하고 있는 자신도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당연히 자신도 '단죄하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 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마치 의로운 것처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해당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몰라서 그렇지 자신도 모르게 무수히 짓는 죄가 있다면 우리는 판단의 죄가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생각으로 짓는 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인 고정된 시각으로만 볼 게 아니라 가끔씩은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단순히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오셨다고만 한다면 너무나도 식상한 묵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치유하신 것 일환이 바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게 아주 쉬운 것 같지만 사람들은 이게 사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유상종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근묵자흑과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 안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모든 생각을 이런 개념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보면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 범위를 그렇게 설정한다면 하느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하느님이 보시기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실까요? 바로 하느님을 알지 몸하는 불쌍한 영혼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복음에도 나오지만 울타리 안에 있는 양만 하느님의 양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은 울타리 밖의 양도 하느님에게는 소중한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안에서는 물론이겠거니와 신앙 밖에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신앙 안에서 저도 많이 반성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바라보며 그와는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은 없는지 한번 진지하게 반성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저희도 사회에서나 아니 공동체 내에서 소외된 그런 사람들에게도 눈길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말은 항상 그렇지만 실제로는 현실과 다른 것이고 그건 하나의 이상에 불과한 수준으만 이해를 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너무나도 서글퍼지실 것 같다는 묵상을 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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