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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윈윈하는 신앙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20 조회수770 추천수0 반대(0) 신고

 

윈윈이란 말은 원래 미국에서 군사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였는데 요즘은 다른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경쟁이 불가피한 사회에서는 누군가는 이기고 또 어느 누구 한 당사자는 지는 구조가 지배적입니다. 특히나 스포츠와 같은 세계에서는 당연합니다. 승자는 반드시 한 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는 달리 윈윈은 서로가 이기는 전략입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모순이 아닌 역설이 될 수 있습니다. 손자병법에도 나오지만 전쟁을 하지 않고도 이기는 전략이 있다면 그처럼 우수한 병법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 전쟁이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막상 전쟁이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상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신앙도 하나의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대방은 다름 아닌 나와의 전쟁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남과 싸워서 이기는 전쟁은 별 실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신앙 안에서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때로 거기에 목숨을 거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와의 전쟁은 어떤 전쟁인지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타인과 어쩔 수 없이 경쟁 아닌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신앙 안에서도 일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하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요즘 며칠 그런 것도 새로운 일을 잠시 하면서 묵상을 해봤습니다. 오월동주를 해서 윈윈하는 것도 상당히 이상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서로가 적국이지만 어떤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을 해야 하는 경우를 가르키는 고사입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이때 적을 적으로만 본다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까요? 물론 적이지만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달성을 하기 위한 과정 중에는 적을 적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고 오히려 아군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오늘날 사용하는 개념인 윈윈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는 전혀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은 아닌데 최근 새로운 일을 잠시 하면서 크게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그게 이런 묵상을 하게 된 단초가 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하는 일에는 전문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이 업무를 하기 위해서 물론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 수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어공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프로그래밍도 공부를 합니다. 사실 책으로 이론을 공부를 하고 습득을 해도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책으로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에서 일하는 현장 사람은 이론을 잘 모릅니다. 사실 요즘 세상에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학력이 있다고는 하나 최점단 분야를 하는 분야에서는 복잡한 이론을 다 잘 알기가 힘드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지식만으로 단순 반복된 동작을 로봇처럼 무한반복을 하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분명히 한계에 부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수준 이상으로 발전을 할 수도 없고 만약 기업이라면 더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기엔 무리가 따릅니다. 

 

저는 현장 근로자에게 제가 아는 총 지식을 동원하여 이론을 설명해 줍니다. 저는 그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그 현장 근로자는 오랜 반복적인 일을 처리하면서 얻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사실 그 경험이라는 지식은 경험으로 알게 되었지만 왜 그런지는 잘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들을 통해서 그분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얻었던 경험을 저에게 공유를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미로처럼 복잡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이론과 실무과 서로 만나니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서서히 퍼즐이 맞추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생소한 분야이지만 뭔가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 일을 체험하면서 많은 것을 묵상해봤습니다. 그분들은 마치 나무만 보는 분들이었습니다. 부분적인 것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처음엔 나무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그 정도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무만 봤기 때문에 산의 모습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자신의 지식을 경유하다 보니 어느 단계에서는 숲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숲을 보니 이제 그 나무가 더 잘 보여지게 되었습니다. 나무만 봤을 때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지식은 어떤 지식이었겠습니까? 경험으로 얻은 지식입니다. 

 

만약 그분들이 그 지식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제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전했을 테니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만 전해줬을 테고 그렇게 되면 그분들도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어슬픈 지식으로 와 닿을 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근데 결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그분들도 나름 현업에서 전문적인 일을 수행하긴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지식을 통해서 이론을 습득하게 되니 어떤 돌발적인 문제나 변수가 발생했을 때 이젠 대처를 할 능력이 생기는 걸 봤습니다. 

 

이런 상황을 신앙에 접목해봤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때로 경쟁아닌 경쟁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는 기도생활을 많이 하지 않으면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시기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여러 사례가 많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공동체의 배에 탑승을 한 사람과도 같습니다. 많은 탑승객들이 있습니다. 다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승선한 것입니다. 다들 개성도 있고 성격도 다 다르기 때문에 마찰과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걸 마찰과 갈등으로만 이해를 한다면 배는 산으로 갈 것입니다. 누군가 훌륭한 선장이 있어서 그 배가 산으로 좌초가 되지 않도록 리더쉽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는 어떤 리더쉽이 발휘되어야 할까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마치 인간세상에서도 서로 지식을 공유하면 서로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까 하고 머리를 맞대고 문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리더쉽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목적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할 경우도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게 어떤 싸움에서 진 게 아닙니다. 패배가 아닙니다. 승리를 위해 자신이 자신의 생각을 양보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양보를 실패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양보는 하나의 아름다운 미덕이라고 보지 않습니까. 결론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그럴 겁니다. 자신만 돋보이고 싶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어떤 사람과 한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이 사람처럼 경쟁 상대로만 생각한다면 그 어떤 것도 공유를 할 수가 없고 그렇게 되다 보면 윈윈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보완이 되어 더 나은 결과로 성장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근시안적인 사고 때문에 그 자리에서만 맴돌게 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원리는 사람 사는 세상이나 신앙 공동체나 모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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