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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0 연중 제4주일...독서,복음(주해) 해외 원조 주일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29 조회수1,055 추천수1 반대(0) 신고

해외 원조 주일

한국 교회는 1울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올바른 홍보와 신자들의 의식 강화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에 대한 원조에 쓰인다.

 

 

1독서<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4-5,17-19

요시야 시대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잘 내가 너를 세웠다.

1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자신을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시어 온 땅에 맞서게 하셨다고 한다.

 

 

 

2독서<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조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라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저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디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31

열망하십시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법적으로는 명령법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직설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과 14.1을 참조해 볼 때 명령법으로 보는 것이 낫다.

 

직역하면 넘쳐남에 따라” “특출하게. 특별하게인데, 어떤 이들은 가장 훌륭한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13.1

13장은 12-14장의 문맥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문맥은 13장 처음과 12장 끝을 연결해 읽고, 13장의 끝 부분과14장의 첫부분을 연결해서 읽으면 분명히 드러난다. 12.31에서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들을 열망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길게 말한 다음, 14,1에서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영적인 것들을, 특히 예언하는 것을 열망하십시오라고 당부한다.

 

사랑과 은사들의 관계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물론 사랑이야말로 열망해야 할 하느님의 귀중한 선물, 즉 넓은 의미로는 은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은 외적으로 특별히 드러나는 영의 선물인 은사는 아니다. 13장에 의하면 사랑은 은사들과 다른 차원에 있으며, 여러 가지 은사 중의 하나가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상한 언어, 예언, 지식 등 모든 은사가 아무것도 아니다.

 

은사들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남는다고 바오로는 계속 강조한다. 31절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은사가 아니라 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13장에 의하면 사랑은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한 특은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없서서는 안된 내적인 하느님의 성물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인생의 이다.

13장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영적인 것들, 사랑의 소중한 장점들, 사랑은 영속하나 다른 영적인 것들은 사라짐.

 

천사들의 언어이상한 언어를 연상시킨다. “이상한 언어를 시끄러운 징이나 꽹과리에 비유하는 말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고린토의 광신자들에게는 찬물을 끼얹는다. 여기 1-3절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은사라도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이상한 언어의 은사를 염두에 둔 말을 제일 먼져 하는 것도 의도적이다.

 

3

본문비평상 문제가 있는 곳이다. 히나 카우테소마이라고 읽는 사본들을 택하면 위에 제시된 번역이 옳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일부 사본들은 히나 카우케소마이라고 읽는데, 이런 본문을 택하면 내가 사랑하도록또는 내가 자랑할 만큼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참된 사랑의 길

원문을 보면 4-7절 소단락의 모든 문장에서 주어는 사랑이다. 주어인 사랑외에는 명사가 매우 드물며 수식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으면서도 짧은 글 안에 동사가 무려 열다섯 개나 사용된다는 사실은 13장에서 말하는 사라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라는 것, 즉 행동들로 드러나는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4-7절 중간에 나오는 일련의 부정문들은 고린토의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상태를 염두에 둔 듯하다. 파멸과 분열. 시기와 경쟁, 교만한 태도, 약자들에 대한 무관심 또는 무리.

 

너그럽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 찾아보면 분노에 더디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를 번역한 말이고 친절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어질다, 착하다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말이다. 이 두 단어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표현한 것으로서 사랑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이 신적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사랑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비록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를 둔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말해준다.

 

6

불의진리가 대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 나오는 진리는 진리에 따른 행동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7

덮어주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단순히 덮다를 의미할 수도 있고 덮어주다라는 번역에 나타나 있듯이 침묵으로 상대의 결점이나 실수를 덮어주다”, 참아주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견디어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곧 다시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7절의 덮다라는 동사는 둘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4-7절 소단락 마무리하는 7절에서는 모든 것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

 

사랑의 불멸성

13,8-13에서 유의할 것은 종말론적 전망이다. 10-12절의 온전한 것이 오면또는 지금은 ... 이지만 그 때에는 ...”이라는 표현은 단편적이고 불완전하며 간접적인 현재와 온전하고 직접적인 그 때와 미래가 대조되어 있다. 13절에서는 미래적 표현이 현재로 바뀐다. “이제는 ... 남아 있습니다”. 이 말이 종말론적 표현이나 아니면 논리적 표현이냐는 학자들간에 견해차이가 있다. 이 단락의 배경에는 불완전하고 과도적임 일시적인 것들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

 

이 과연 무엇이냐데 대한 질문이 있다. 이 질문에 바오로는 오직 믿음. 희망. 사랑만이 남아 있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가장 큰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그는 요란하고 황홀한 체험들이 유한성과 일시성의 굴레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단조로운 것 같은 일상생활속에서 드러나는 사랑만이 자유롭게 한다고 가르친다.

 

8

스러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일차적으로 떨어지다. 무너지다. 망하다라는 뜻이고 나아가 중지하다. 그치다의 뜻도 있다.

 

9

9-12절 안에 네 번이나 단편적으로라는 말과 없어진다는 동사가 사용되는데 이는 온전한 것이며 결코 스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인 사랑을 대조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11

11절에 rhksg 에페4,13-15 참조. “그만두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은 없애다의 뜻이 있다.

 

12

어렴풋이본다는 뜻, “거울로 본다는 표현에 이어 수수께끼로 본다는 표현은 인식의 간접성과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수수께끼난 상징들은 해석이 필요하다.

 

9-11절의 단편적 인식12절에서는 간접적인식으로 특징지어진다. 거울을 통해 드러나는 상은 실상이 아니라 모사된 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사용하는 표현의 구약성서 배경에 의하면 하느님은 예언자들과는 환시나 꿈으로써 이야기하시지만 당신 종 모세와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직접 말씀하실 정도로 모세는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다.

 

8.3 참조. “온전히 알려진은 원문에서는 한 단어이며 이른바 신학적 수동태다. 그러므로 나도 온전히 알려진하느님이 온전히 나를 아시는이라는 뜻이다.

 

13

8절에서 이미 언급된 예언,(이상한)언어. 인식. 세가지 은사에 반해 믿음. 희망. 사랑 세 가지가 언급된다. 바오로는 예언과 언어와 인식은 모든 그리스도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님 언젠가는 그치고 말 것인데 비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그리스도 신앙인의 삶을 위해 필수적이며 남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성인 소위 향주삼덕이라는 믿음.희망.사랑은 1데살 1.3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희망이 맨 끝자리에 있다. , 데살로니카 신자들이 하고 있는 믿음의 일”,“사랑의 수고”, “희망의 인내에 대해 기억하면서 하느님께 늘 감사드린다고 한다.

 

 

 

 

 

 

복음<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1-30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21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21

직역하면 이 성경은 오늘 여러분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사야의 구원 예언이 예수님의 출현으로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루카는 오늘”, “이 날”,“”“찾아오신 때등 현재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23

루카복음만 본다면 예수님은 이제까지 가파르나움에 가신 적이 없고 장차 거기서 활약하실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께서는 가파르나움을 근거지로 하여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한동안 활약하신 다음에 비로소 나자렛 고향에서 설교하셨다. 마르 6,1-6ㄱ은 이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전한다.

 

25

기원전 9세기에 엘리야가 이방인 과부를 돌보고 그 제자 엘리사가 이방인 나병환자를 고쳐준 사화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척당한 사실과 초대교회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척당한 다음 이방인들에게 포교한 사실을 설명하려고 도입한 것이다.

 

29

나자렛이 산 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상 나자렛은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30

예수께서는 신묘하게도 죽음을 면하셨다고 한다. 루카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게끔 마런되어 있었던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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