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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코로나로 인해 우울해진 신앙을 극복하는 대안을 모색한다면....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31 조회수844 추천수2 반대(0) 신고

 

가톨릭 굿뉴스 신앙마당에 묻고답하기 코너에 올라온 내용입니다. 자매님의 친구분이신 교우이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여파로 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러 가지 활동에 제약을 받다보니 약간 우울증 같은 증상을 가지고 계신다고 토로하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저는 조언을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어봤으면 하는 취지로 제 생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코로나 하면 격리와 폐쇄라는 말과 자주 접하게 됩니다. 로마에서 원래는 더 계셔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공부를 접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신 신부님 때문에 제가 사실 신부님도 뵙고 싶은 마음에 인천에 도착 후에 천안에서 격리가 된 후에 천안으로 직접 갔습니다. 저는 관구장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신다는 말씀을 들어서 실제 먼거리에서 뵌 적이 있었지만 윤주연 베네딕토 신부님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신부님이 내려오셨더군요. 그분도 아시는 신부님인데 중간에 관구장님으로 되신 것입니다. 저는 그날 알게 된 것입니다. 마산에 계실 땐 성소담당 신부님이셨습니다. 이날 신부님과 관구장님과 천안에서 식사를 하고 신부님과 광주 수도원으로 가면서 그동안 메일로만 주고받았다가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방금전에도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았지만 신부님과 알게 된 세월이 6년 정도 되지만 단 한 번도 세상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영적인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부님은 저와 이제는 신분을 떠나서 영적인 친구처럼 지냅니다. 신부님께서 격리중에 있었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옆 방에 한 아가씨가 있었는데 격리가 며칠이 되니 처음엔 노래를 부르다가 나중엔 소리도 지르고 했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폰도 다 있고 해서 그 안에서 인터넷으로 소통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저런 상황이라면 답답한 면은 분명 있을 겁니다. 저도 힘은 들긴 들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또 때로는 성체 앞에서 조배를 하는 것과 같은 기도로 어느 정도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긴 다르지만 2차 세계대전 때 이런 것을 실험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자유를 박탈되게 되면 심리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의도적인 폐쇄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말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한 후에는 그동안 열심히 일을 했으니 퇴직 후엔 열심히 자기 시간을 가지고 여행이나 하면서 즐겁게 인생을 보내고자 한다고 말입니다. 막상 그렇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도 힘든 생활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뭔가 구속되는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구속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구속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인간은 생존을 하면서 의미를 추구하는 가치실현을 느껴야만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게 되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어느 일정 기간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걸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간도 무작정 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유통기한처럼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간을 벗어나면 그런 생활마저도 단조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단조로움에 뭔가 의미가 있다면 결코 단조로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의미가 있는 생활이냐 아니냐 여기서 갈라지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유례없는 팬데믹으로 인해서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예전과 같은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판단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을 시련이라고 말하기엔 그렇지만 역경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역경이 없을 순 없습니다. 생각의 관점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역경이라는 것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라면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달라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전체적으로 보면 세 가지 현상으로 나누어졌습니다.

 

하나는 코로나로 인해서 오히려 신앙이 성장한 그룹이 있습니다. 신앙이 떨어진 그룹도 있습니다. 그럭저럭 그런 대로 유지하는 신앙도 있습니다. 두 가지의 경우는 이해가 될 수 있는데 코로나로 성장한 신앙이라고 하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근데 사실 심리적으로 보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랜 시간 애들을 지도한 사람입니다. 어학이라는 것은 단시간에 지식을 올리기 힘듭니다. 어학은 인내와 반복과 싸움입니다. 사실 무엇보다도 머리도 머리이지만 지루함과 싸워야 합니다. 알아도 끊임없이 반복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나라 말을 잘 배울 수 없습니다. 저는 애들한테 방학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항상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평소에 공부하는 양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뒤처진 사람은 방학이라는 것을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실력을 보충할 수 있는 시간이자 기회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 애들을 봤을 때 제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생각을 가진 아이도 있습니다. 똑 같은 시간과 환경이 주어졌을 때 실력이 떨어진 아이는 그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실력을 보충할 시간을 버는 학생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실력이 더 나은 학생은 더 실력을 보충할 시간으로 만드는 학생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논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욕심은 좋은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만약 지금까지 나의 신앙이 조금 미진했더라면 이때 지금까지 하느님께 부족한 자신의 신앙을 보충해서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 돼 열심히 해서 보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면 힘을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팬데믹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인식을 바꾸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는 이번 코로나 시국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로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기회는 누구나 다 적용되지만 살리는 사람이 있고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성숙도에 상당한 차이기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시간에 신앙을 지킬 수 있기 위해서 자기만의 노하우를 만들어야 하고 또 그런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건 교회가 해 줄 수도 있지만 천주교의 생태를 보면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살 방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부방침을 따르면서 신앙 안에서도 마음에 맞는 신앙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나이가 비슷하면 좋겠지만 굳이 나이가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신앙인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서로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기쁨과 슬픔을 교감하는 것도 우울한 신앙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게 아주 좋은 방법이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하는 정도입니다. 이건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지극히 최소한의 몸부림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수준에서 머문다면 코로나 이전의 신앙과 비교해봤을 때 그냥 그럭저럭 하는 신앙과 같을 것입니다. 그 수준을 넘어가기 위해서 그럼 어떤 것을 하면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교우들과 교제를 하면서 자기만의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신앙이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세상 모든 것과 떨어져서 하느님과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면야 그처럼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사랑하는 수도자라도 그렇게만 하고 살아라고 한다면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말씀을 공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성장도 성장이지만 신앙을 잘 유지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쩌면 성장보다는 유지가 더 현실적인 의미가 있을 겁니다. 

 

앞으로 팬데믹이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설령 지금 코로나 사태가 종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역사를 보면 또 앞으로 어떤 바이러스가 인류를 위협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만약에 앞으로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이 된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럼 이론적으로는 코로나 이전의 신앙생활로 돌아갈 것 같은지요? 

 

저는 그게 쉽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가 일어난 지 근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신앙생활을 떠나서 사회학자들이 진단하기로는 지금 시점은 코로나 이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임계점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금의 상황에서는 종식도 종식이지만 설령 종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신앙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앞으로 몇 년을 단기적으로 바라보는 신앙에서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시간 동안 어떻게 생존할지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유지해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잘 유지할 거라는 보장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힘들 것입니다. 그건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신앙의 유통기한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1년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유통기한을 늘려야 할 것입니다. 이 길만이 지금의 어려운 시간과 역경을 잘 해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 

 

장문의 글을 작성했지만 결론은 단 한 줄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한 줄로 결론을 말할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장문을 작성한 이유는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신앙을 놓치지 않고 붙들 수 있을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시간이 계속 지속된다면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씩 신앙에 균열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지금 괜찮다고 해서 언제나 괜찮을 거란 생각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유비무환'일 것입니다. 비단 우울한 신앙으로 되는 문제만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우울한 것도 문제지만 우울한 것도 차라리 낫다고 평가할 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언제일까요? 만약 신앙이 격격하게 떨어져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리 됐을 때입니다. 그땐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차라리 우울할 땐 우울하긴 했지만 하느님과 이처럼 관계가 멀리 소원하지는 않았지 않았던가 하면서 말입니다.  

 

한 가지 마지막으로 다시 추가할 내용이 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신앙이 위축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코로나가 없었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건 의미없는 반복된 신앙생활이 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삶에 있어서 의미가 없다면 또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삶 그자체가 무미건조한 삶이라고 생각해서 우울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우울증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팬데믹으로만 볼 게 아니고 시야를 넓혀서 자신의 신앙 반경을 넓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에 지루한 신앙으로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지루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바로 신앙의 권태기가 될 것입니다. 신앙의 권태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해왔던 신앙의 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줘야 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결국 하느님과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 이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서 하느님을 놓치지 않고 이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많은 고민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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