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십자가도 따뜻한 위로의 말 앞에서는 무너지더군요.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01 조회수696 추천수2 반대(0) 신고

 

우리는 살면서 많은 강론과 말씀에서 언급하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보통 어떤 생각을 할까요?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는 고통이고 또 피하고 싶은 존재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만약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도 '제 십자가'에서 보면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누구도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품을 것인가 이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세를 받고서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경남 고성에 있는 올리베따노 수도원에서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과 수도원 밖에 있는 방갈로에서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말씀하신 것은 지금은 다 잊었지만 한 가지 기억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진다의 그 진다의 의미가 품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성경적인 번역의 의미를 가지고도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지는 것은 수동적인 의미를 다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품는 것과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품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지는 것 같은 의미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회피하고 싶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와 함께하는 삶이 우리의 신앙여정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은 지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날마다'라고 하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사는 날까지는 십자가와 공생을 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운명이라면 십자가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십자가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삶 그자체가 고통과 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마다의 십자가를 매일 그것도 지어야 한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길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중의 한 방법이라면 그건 무자비한 하느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무자비한 하느님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리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십자가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십자가는 고통이고 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게 진정 고통이라면 그런 하느님은 당장에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의 각도를 조금 다르게 보면 어떨까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인데 그 창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즐기시겠습니까?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뭔가 우리가 모르는 피치 못할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영국 국립 박물관에 도자기 하나가 전시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불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하나는 불에 들어간 도자기였던 것입니다. 수상이 그 이유를 관장에게 물었습니다. 왜 불에 들어가지 않은 도자기를 전시했는지 말입니다. 불에 들어가지 않은 도자기는 도자기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무언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둘을 나란히 전시했던 이유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가 세상이라는 불가마 속에서 달구어지는 도자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주인은 언젠가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 같습니까? 복음에서는 깨어 있는 것을 강조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와 연관지어서 깨어 있다는 의미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를 품을려고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품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 그자체를 보면 절대 품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 자기만의 아킬레스건 같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에게는 많은 십자가가 있지만 공동체 내에서 겪는 십자가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본당으로 교적을 옮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힐 수가 없습니다. 정말 세상 집단 같으면 고민도 할 것 없이 여기 아니더라도 다른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한 누나가 말을 했긴 했습니다. 지금 조금 고통스럽다고 다른 본당으로 옮긴다면 베드로씨는 패배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씨를 응원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에겐 참 이 문제가 어려운 십자가입니다. 얼마전에 최종 결종을 했습니다. 아예 먼곳으로 이사를 해서 교적을 옮기려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까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평소 가까이 지내는 형제님께 저의 이런 고민을 여러 차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한번 찾아가 이런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이때 이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어려운 것은 알지만 그래도 참고 우리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같이 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인정에 약한 게 저의 단점입니다. 완곡하게 말씀하시면서 같이 공동생활을 하자는 말씀에 또 저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십자가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번에 무너졌다고 해서 또 안 생긴다고는 보장을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십자가와 싸우는 게 신앙인 것 같습니다. 만약에 신앙에서도 이런 형제님이 없었다면 저는 그냥 교적을 다른 본당으로 옮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저희 본당에 계시는 누나인 자매님이 하신 말처럼 그냥 패배자가 되어 다른 본당에서 생활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누나가 인간적인 표현으로 패배자라고 했지만 누나도 저희 본당에서 같이 생활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표현으로 저의 생각을 단념하게 하려고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와 상관없이 만약 누나의 표현대로라면 제가 저의 십자가를 잘 이기지 못해 교적을 옮겼더라면 제 신앙의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기는 선례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앙 안에서 위로의 따뜻한 말 한 마디였던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 않게 응원해 주는 자매님 같은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안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지금 나의 따뜻한 한 마디와 또 남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며 위로하며 사는 게 그 사람에게는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를 들어줘서 한결 수월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도 큰 사랑 실천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꼭 거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인사를 해도 상냥하고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하는 것도 인사를 받는 사람에게는 한 줄기 생명과도 같은 빛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따뜻한 미소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가치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걸 많이 느낍니다. 어쩌면 따뜻한 미소 하나가 사람의 영혼에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모르는 그만의 십자가에 눌려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며 하느님을 따라 가는 교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우리로서는 그와는 상관없이 만약 그런 상황에 있는 형제자매라면 이때 우리가 전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에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아끼지 말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게 된다면 이 또한 하느님의 사랑 실천이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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