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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 수요일 주님 봉헌 축일 ...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01 조회수943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4

2,14-18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운 분인가를 그분의 강생, 특히 수난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리스 철학이나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겉으로만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피와 살을 지닌 완전한 사람이셨고, 육체적으로 온갖 고통을 다 겪으신 연약한 사람이셨다. “피와 살은 유다인들이나 초대교회가 사람”,“인성등의 의미로 쓰던 단어다. 가끔 하느님과 상반되는 뜻으로 쓰이며 살과 피의 순서가 바뀐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악마는 후기 유다이즘에서 악과 죽음의 근원, 죽음을 관장하는 존재로 여기셨다. 지혜서에서는 악마의 질투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러한 악마를 파멸시키고 승리하신 방법은 더 큰 힘을 사용하셨기 때문이 아니고 죽음 자체를 통해서였다. 그분은 스스로 희생됨으로써 죽음의 원인인 죄를 이기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켜 죽음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진 악마를 무력하게 만드셨다.

 

15

누가 빚 때문에 노예가 되었으면 그 빚을 갚아야 자유를 찾는다. 인류는 죄를 지어 악마의 노예가 되고 죽음의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되시고 그들과 똑같이 죽고 묻혀 죄의 빚을 갚고(1고린 15,20-22)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1고린 15,52-57; 로마 5.21 참조).

 

16

창세 12-22장 등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신약에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나아가 이 말은 신약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9절과 관련되어 모든 사람을 뜻한다.

 

17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대제관이라 부르는데, 이 대제관을 하느님 앞에 성실하고 자비로운 분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그의 사명이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것임을 명시한다. “자비로운가엾게 여기는또는 동정심이 많은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자비로운 대제관이심을 매우 강조하며, 이에 대해 4.15-5.10에서 다시 상세히 설명한다. 또 자비에 못지않게 중요한 개념은 성실한이다. 이 단어는 신뢰할 만한또는 충실한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성실한 대제관에 대해서는 3.1-4.14에서 길게 설명한다. 시편도 자비롭고 성실한이라는 합성어를 가끔 사용한다.

 

속죄하다는 구약 속죄제사 용어로 희생제물을 바쳐 사람의 죄를 보상하고 잘못을 기워갚는다는 말이다.

 

18

그리스도와 사람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의 결론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똑같이 시험과 고난을 받으신 분임을 강조한다. “시험을 받다유혹을 당하다의 뜻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이 겪는 유혹을 당하다의 뜻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이 겪는 온갖 시험과 유혹을 가리킨다. 따라서 굳이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분은 연약한 사람으로서 시험,고난, 유혹 등을 다 체험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아파하시며 그 어려움을 이기도록 도와주신다.

 

 

 

 

 

 

복음<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2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현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씨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정결례-속량

22,24절에서는 정결법을,22-23절에서는 속량법을 다룬다. 여기 정결법은 다음과 같다. 남아를 낳은 산부는 40일간 여아를 은 신부는 80일간 불결한 것으로 여겼다. 남아의 산모는 40, 여아의 산모는 80일이 지난 다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가세가 가난한 때는 빈자의 제물이라 하는데 마리아도 그렇게 했다. 출산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부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요셉은 정결례를 치를 필요가 전연 없었는데도 그도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그 예를 행했다는 식을 말한다.

 

맏아들을 속량할 때 부모나 아기가 성전에 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들이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는 것은 엘카나와 한나가 어린 자식 사무엘을 실로 성전에 바쳤다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1사무 1,24-28)

 

23

출애 13,2,12,15,

 

24

레위 12.8

 

25

즈가리야와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처럼 시메온도 의로웠다고 한다. 여기 의롭고 경건하다는 다같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뜻이다. 위인 탄생에는 흔히 시므온 같은 사람이 나타나 아기의 장래를 예언하는 법. 불교의 원시 경전 숫다니파아타를 보면 석존이 탄생하자 아시타라는 선인이 나타나 아기를 안고 사아카 족에게 이렇게 예언했다 한다. “이 왕자님은 정각의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이분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청정을 보시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불쌍히 생각하는 까닭에 법륜을 돌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뜻과 행동이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제 여명은 길지 않고 중도에 저에게 죽음이 찾아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위로받기를은 직역하면 이스라엘의 위로를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뜻한다.

 

26

주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이다.

 

29

루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 세 편을 1,46-55.68-79;3.24에 옮겨실은 바 있다. 이 노래들은 본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노래한 것 같은데, 루카는 마치 마리아가 예수 잉태를 노래 한 양 즈가리야가 요한 출생을 노래한 양, 천사들이 예수 탄생을 노래한 양으로 꾸몇다. 이제 29-32절에 또 한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의 용어, 문체, 보편적 구원사상은 제2 이사야서와 매우 비슷하다. 이 노래의 출처를 정확히 밝히기란 어렵다. 다만,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두고 민족적 자부심을 지닌 교회,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한 교회에서 만들어 부른 노래라 하겠다. 아마도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의 노래였으리라.

 

주재자는 그리스어 데스포테스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생사 대권까지 쥔 절대 지배자라는 뜻이다. 29; 사도 4.24; 묵시 6.10에서는 하느님을, 2베드 2.1; 유다 4에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다.

 

풀어 주다는 쉬게 하다.죽게 하다. 두 가지 뜻이 있다.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에서 부른 노래에서는 쉬게하다는 뜻이었으리라. ,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학수고대하느라 몹시 긴장한 유다인들에게 그 일을 이룩해 주시어 이제 쉬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주인이 수직 임무를 마친 종을 쉬게 하듯,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시메온이 자기 심정을 토로한 셈이다. 늘그막에 예수님을 뵈었으니 이제 편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30

당신의 구원”, 곧 하느님의 구원은 해외 유다인 노래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읊었으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뜻한다.

 

31

이방인들도 구원의 혜택을 입는다는 보편적 구원관이 루카복음에는 여기 31-32절에 명백히 나온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지 않으셨다고 해석하는 분도 계십니다. 유혹은 인간으로 빚어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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