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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사람은 같은 죄에 자꾸 무너지는가? 그렇다면 과연 묘안은 없는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02 조회수824 추천수3 반대(0) 신고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을 하게 되는 문제가 바로 같은 죄를 계속 짓고 그 죄에 무너진다는 고통입니다. 차라리 무너지더라도 다른 죄로 무너진다면 조금은 나을 것인데 하고 자책을 하면서 말입니다. 사람마다 다 십자가가 다르듯이 자기만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죄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아무런 죄도 아닌데 유독 자기한테만은 힘든 죄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릅니다. 신학적으로 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말입니다. 근원적으로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죄가 뭔지는 교리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리라는 것도 말씀에 기초해서 신학적으로 정의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신학적인 이론에서 벗어나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저도 이런 고민을 많이 해봤지만 얼마전 한 신부님과 통화를 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토론을 해봤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 바쁘신 일이 있으셔서 오랜 시간 통화를 하지 못했지만 신부님께서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 많이 공감하셨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무의식 중에 평소 생각을 하게 돼서 그때 떠오른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신부님과 영적인 대화를 하면서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통화를 한 후에 신부님께 문자를 드렸습니다. 어쩌면 신앙의 가르침은 책이나 말씀, 성인들의 가르침으로도 배우고 깨우칠 수도 있겠지만 영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도 공감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신부님께서도 통화를 끝내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묵상을 하고 글로 표현하면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게 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참 아쉽네요. 그날 통화를 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많이 휘발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생각한 게 있어서 나름 최대한 복원을 해보려고 합니다. 

 

생각의 관점을 조금 달리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히려 희망적인 내용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동일한 죄를 반복하면 누구나 자책을 하기 마련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왜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하고 말입니다. 또 만약 그 죄에 대해 끊임없이 성사를 본다면 성사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도 한심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신부님께도 미안할 부분도 있을 겁니다. 제가 생각의 관점을 다르게 본다면 어떨까 하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죄는 상대적으로 물론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반복해서 짓게 되는 죄보다는 극복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주 계속해서 무너지는 죄는 죄의 경중을 떠나서 자기에게는 지독한 죄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 죄를 만약 극복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다른 여타의 죄를 만약 지었을 경우에는 그 죄를 극복하는 경우는 상당히 쉬울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내가 그 죄를 지을 수 있는 유혹과 환경에 처했을 때 그만 그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에 그 죄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유혹에 잘 대처하고 또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을 경우에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넘어간다면 그건 일부러 죄를 짓겠다는 마음을 먹고서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를 짓기 전에는 그런 유혹이 있어도 그게 그 순간은 유혹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꼭 그런 유혹에 넘어간 후에서야 그게 유혹이었다는 사실과 또 그런 유혹에 자신이 넘어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그 시점에서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전에 그게 유혹이라는 사실 그자체만을 안다는 것도 죄를 극복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될 것인데 그게 잘 안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같은 죄에 자꾸 넘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리'라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리라는 것은 생활의 습성이나 본능을 뜻합니다. 습성이라는 것은 일회적인 현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여러 번의 반복이 따를 때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동일한 죄를 반복하고 또 넘어지게 되면 그 속에 우리가 모르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죄의 생리를 알게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는게 당연할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넘어지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죄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중죄라면 고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중죄가 자기만의 취악한 죄라면 계속 고해를 하는 반복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해를 하는 것도 어느 정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죄를 극복하려는 최소한의 의지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고해를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우리가 말하는 그런 양심이 아니고 신앙적인 양심 말입니다. 내가 그래도 신앙인인데 아무리 인간이 나약한 존재라 죄를 짓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허구한 날 계속 이렇게 죄를 신부님께 고백하는 것도 염치라고 하면 조금 그렇지만 염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양심이 자신이 어떤 죄를 짓게 할 때 그런 죄를 짓게 하는 상황을 막아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건 저의 살아있는 체험입니다. 

 

근데 그렇게 하는 데에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죄를 언젠가는 뿌리를 뽑겠다는 또 언젠가는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고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한다면 고해성사를 남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고해를 난 후에 다음에 또 죄를 지으면 또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니 그때 고해를 보고 죄를 용서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고해를 하게 되면 오히려 고해성사라는 게 죄를 조장하는 결과를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이상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극복하려고 하는 굳은 의지가 있을 때 그때 하느님의 자비가 작동할 것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자비가 작동되겠지만 말입니다. 

 

죄의 생리를 잘 알게 되면 그땐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 죄에서 조금은 벗어나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죄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이미 이젠 죄의 근원적인 속성을 알게 되어 좀처럼 쉽게 죄에 빠져드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자꾸 지어야 한다고 하는 식의 죄 짓는 것을 미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존재다 보니 자꾸 죄를 짓게 되는 결과가 벌어졌을 때 그런 자신을 보며 난 안돼 하는 그런 자포자기의 상황보다는 이게 좀 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을 그런 위험한 죄의 수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더 현명한 신앙인의 자세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풍성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죄를 극복하려고 하는 의지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명심보감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명심보감의 말이 아니더라도 저는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노력을 했을 때 하느님께서도 그 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큰 교만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주 자기만의 아킬레스건 같은 죄에서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죄를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을 하게 되었을 때 반드시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고 그 죄를 극복하는 날이 올 거라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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