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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사랑의 계명인 이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
작성자김 글로리아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03 조회수1,15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22년 다해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사랑의 계명인 이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

 

 

 

 

 복음: 마르코 6,14-29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헤로데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냥 진실을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현실을 왜곡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나 옛 예언자 중 하나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 죄책감으로 장난을 칠까요? 양심일까요? 자아일까요? 양심은 그저 그것이 죄임을 알려주는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심판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있어야만 자신이 자기 주인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에 대해 자주 제가 사용하는 예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새총으로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장작 사이에 죽은 오리를 몰래 감추어놓았지만, 이것을 여동생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동생은 오빠를 부려먹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나 심부름이 있으면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할머니에게는 “오빠가 다 하겠대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동생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너무 힘들어 할머니에게 모두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단다. 단지 네가 동생에게 어디까지 끌려다니나 보고 있었던 거란다.”



    여기서 오빠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여동생은 자아입니다. 자아가 오빠를 부려먹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은 할머니입니다. 오빠가 할머니에게 용서를 받으면 자신은 오빠에 대한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동생은 일단 죄책감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무서운 분으로 여겨야 자신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오빠가 할머니에게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 자체이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뱀이 죄짓게 하고 뱀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게 만드는 일이 ‘두렁이’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가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려고 사용하는 위장막이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입니다. 



    방어기제는 무수히 많지만 대충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1. 억압: 예전에 안 좋았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압해서 결국엔 잊어버리게 되는 것

2. 부정: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병에 걸렸을 리가 없어’와 같은 상황입니다.

3. 투사: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싫어하면서 상대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4. 전치: 나의 감정을 다른 이에게 푸는 것입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것입니다. 

5. 취소: 과거에 한 행동을 보상하는 행동입니다. 아이를 때려놓고 미안해서 안아주는 행동과 같습니다. 

6. 합리화: 자신의 환경 등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7. 신체화: 감정이 해결되지 않을 때 그것이 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화병과 같은 예입니다. 

8. 행동화: 감정을 바로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욕을 하고 벽을 치는 돌발행동을 합니다. 

9. 동일시: 닮아가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아가며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10. 반동형성: 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미운 상사에게 대들기보다 오히려 아부를 하거나 지나치게 공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출처: ‘방어기제’, 유튜브, ‘정신과 말해주는 남자’]



    더 세분화하면 방어기제는 50가지도 넘습니다. 자아는 우리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이러한 것들을 해야만 한다고 시킵니다. 그런데 결국 그런 것들이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 요인이 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행동 안에 위에 제시된 이 모든 방어기제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어기제는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죄책감을 감소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단절을 가져오고 더욱 큰 죄책감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양심과 같이 자신의 죄를 말해주는 요한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죽였습니다. 방어기제로 충분히 죄책감이 사라졌기 때문에 양심의 목소리는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탄의 기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부터 사랑하는 노력입니다. 모든 죄책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방어기제는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기에 사랑하면 죄책감에서 해방됩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했다면 두렁이를 만들어 입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도 알몸으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음란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두렁이가 필요했고 그렇게 사랑은 변질하였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입니다. 주인공 멜빈 유달은 뉴욕에서 가장 잘 팔리는 로맨스 소설가로 강박 장애에 사로잡혀서 도로의 금도 밟지 않고 피해서 걷고, 매일 같은 식당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는 인물입니다. 그를 유일하게 참아주는 여주인공이 있는데 레스토랑의 종업원 캐롤입니다. 하지만 유달은 표현력도 없고 그녀에게 고백할 자신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를 도와준 이웃이 등장하는데 유달의 아파트 이웃인 게이인 예술가 사이먼과 그의 개입니다. 사이먼은 강도 사건 중 폭행을 당해서 거의 죽을뻔합니다. 개 베르델을 돌봅니다. 처음에는 개 돌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강아지에게 감정적으로 애착하게 됩니다. 동시에 캐롤에게도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됩니다.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유달은 강아지 주인인 사이먼이 부모에게 돈을 청하러 데려가 달라고 할 때,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합니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표현력이 없는 유달에게 캐롤은 실망합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캐롤은 유달에게 더 자신의 인생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합니다. 



    유달과 캐롤 사이는 여전히 서먹한데 사이먼이 유달이 캐롤에게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설득을 합니다. 캐롤은 망설이지만 자신도 노력하겠다면서 고백을 받아들이고 유달과 캐롤이 함께 걸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유달은 아침에 캐롤을 위해 페이스트리 가게 문을 여는데 도로의 금을 밟습니다. 그도 밟았다는 걸 알아차리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강박증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유달이 이 강박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먼저 개를 받아들이고, 그렇게도 싫어했던 사이먼을 받아들이며, 결국에 가서는 캐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지금까지 사랑에 빠지지 못하게 만들었던 방어기제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방어기제를 만들어낸 것이 자기 자신임을 압니다. 결국, 모든 죄는 사랑함으로써 씻겨지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양심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유달에게는 강아지와 이웃, 그리고 캐롤입니다. 이렇게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면 결국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면 애초부터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고 계셨음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나아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문제인 것을 보기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양심과 같은 이웃인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자아를 살리기 위해 양심을 죽인 것입니다. 



    자아는 자신의 정체가 뱀임이 드러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웃 사랑은 방어기제가 보이고 그 방어기제 속에 숨어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만듭니다. 방어기제가 무너지면 죄책감도 줄어듭니다. 죄책감이 사라지면 자아의 힘도 약해집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랑을 제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이를 진심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 이웃이 바로 나의 양심이고 거울입니다. 아내는 문제가 있을 때 눈을 쳐다보며 대화하기를 원하지만 나는 등산이나 낚시를 하러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숨는 방어기제가 아내와의 관계를 계속 멀어지게 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방어기제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없어지기 시작하며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자기 자신임을 발견합니다. 더 사랑하면 더 사랑할수록 그런 방어기제로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아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의 목적입니다.

 

 

 https://youtu.be/4LMgTL2eeks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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