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 연중 제5주일 ...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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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05 | 조회수1,21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1-2ㄱ.3-8 -. 만군의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하시자, 이사야 예언자는 “내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하고 이른다. 제2독서<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11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그가 이미 전한 복음을 상기 시킨다. 주해 2절 “무슨 말로 (복음)전했는지”에 해당되는 원문은 간접의문문으로 되어 있어서 번역에 어려움이 있다. 3절 랍비들이 전승의 권위를 강조한 것과 같은 식으로 “전해받다”동사와 “전해주다”동사를 함께 사용하여 전승을 주고받는 관계를 표현한다. 3ㄷ-5절에서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들의 “전통적 신앙고백문”을 전한다는 것은 신약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사실이다. 3ㄷ-5절은 네 개의 “...셨다는 것”이라는 문장 또는 세 번의 “그리고 ...셨다는 것”이라는 문장에 의해 나머지 글과 뚜렸이 구별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3ㄴ-8절 문장들의 주어는 3ㄴ절의 “그리스도”뿐인 것이 매우 강한 인상을 준다. 장중한 도입부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으로 안내한 복음의 내용인즉 바로 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4절 3ㄷ절과 4ㄴ절에서 반복되며 평행을 이루는 “성경대로”라는 문구는 그리스도의 “죽음심”과 “부활하심”이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내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5절 3ㄷ-5절에 의하면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죽고 묻히고, 일으켜지고, 나타나셨다”는 네 가지다. 그런데 “묻히셨다”는 것은 “죽으셨다”는 것을 “나타나셨다”는 것은 “일으켜지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말이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로 요약될 수 있다. 6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체험한 증인들”을 나열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1-11절 단락에서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바오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도들도 다같이 선포하는 바요 그 선포를 듣고 고린코인들도 믿고 있는바인 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공동기반으로 삼아, 12절에서 바오로는 “죽은자들의 부할”을 거부하는 주장을 반박하려고 한다. 6절 본 것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 만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근거가 확고함을 강조한다. “잠들다”는 “죽었다”의 완곡한 표현이다. 8절 “배넷병신”이라고 번역된 엑트로마는 신약성서에서 이곳에 단 한 번 나오는데, 조산, 유산. 낙태등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만산이 아닌 조산의 경우에 사용되므로 여기서 “바오로가 다른 사도들에 의해 늦게 불리었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바오로가 부름받을 때의 처지가 마치 배넷병신처럼 부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표현이라고 보아야겠다. 9절 바오로 자신이 교회를 박해앴다고 고백하는 갈라 1.13: 필립3.6 참조. 10절 10절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짤막한 일종의 찬미가다. “은총”이라는 단어가 10절에서만 세 번이나 나오고 그 내용도 매우 강조된다. 하느님의 은총은 아무런 효과도 없이 공허하게 남아있지 않고 바오로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을 만큼 효과를 내었다. 그런데 10절에서 말하는 “은총”은 단지 부르심을 받을 때의 은총만이 아니라 그후 “사도”로서의 삶의 전과정에서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모두 포괄한다. 원문에서 “나와 함께”앞에 관사가 있느냐 없으냐에 따라 해석이 좀 달라진다. 위에 채택된 번역문은 관사가 있다고 볼 경우로 하느님의 은총이 더욱 강조되어 있다. 관사가 없다고 본다면 “그러나 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나와 함께(수고)했다”라는 뜻이 되어 하느님 은총을 강조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바오로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수고도 필요없지는 않다는 것도 “나는 그들 모두보다 더욱 수고했습니다”라는 문맥에서 견지된다. 문맥상 하느님의 은총은 바오로의 그 많은 수고의 원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절 1-11절 단락에서 한 가지 더 유의할 점은 바오로가 자신이 지금 고린토 교우들에게 상기시키는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선포가 전승과 합치함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단락의 결어라고 할 수 있는 11절에 잘 나타난다. 복음<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1 주해 1절 “... 때에 있었던 일이다”는 루카가 칠십인역 문체를 본뜬 것으로 같은 표현이 루카복음에 12번 나온다. 5절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높이는 “스승님”이란 존칭은 신약성서 가운데 오직 루카복음에만 호격으로 여섯 번 나온다. 시몬의 답변은 사도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몸가짐. 마음가짐을 일깨우는 명언이다. 곧 아무리 노력해봐야 도무지 결과가 안 보일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저 시몬처럼 다시 한번 일어서랴 하겠다. 8절 “스승님”일뿐더러 “주님”이신 예수의 위력을 체험한 시몬은 한편으로는 예수께로 이끌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분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인간이 신비를 대하면 으레 매혹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법.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어부들이 물고기를 낚다가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하니 낚인 우리들은 물고기이며 이것이 바로 교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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