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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냐 바라바냐 [요한18:33-40]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07 조회수1,061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전에 요한복음서 강의 내용중에 일부를 올려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목적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시기를 희망합니다. 

 

2022. 2. 7. 

(공동번역성서)

       예수냐, 바라바냐.

[요한18:33-40]

33 빌라도는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를 불러 놓고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34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냐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 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5 빌라도는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너를 내게 넘겨 준 자들은 너희 동족과 대사제들인데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하고 물었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 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37 '아뭏든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하고 대답하셨다. 38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 39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 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 유다인의 왕을 놓아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었다. 40 그러자 그들은 악을 쓰며 '그자는 안 됩니다바라빠를 놓아 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바라빠는 강도였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잡히신 예수님의 재판이 아주 신속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예수님은 군사들에게 붙들리신 후에 대제사장의 장인 안나스의 집으로 후송이 되시죠그 안나스의 집에서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사건이 있고 또 대제사장 가야파의 집으로 옮겨집니다

다시 그 저녁 가야파에 의해서 유대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신 예수님은 책임회피를 하려는 빌라도에 의해서 다시 헤로데에게 보내지죠헤로데 필립.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 아니냐?' 그래 놓구 갈릴리지방 다스리던 헤로데에게 보내요그리고 다시 헤로데가 '이 사람 무죄한 것 같은데그리고 조롱하다가 다시 보내줘요다시 또 빌라도의 법정으로 되돌아오십니다

그리고는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바로 그날 십자가에 달리시는 거예요그런 재판이 어딨어요그건 율법적으로도 불법입니다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어요상황이 무척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과정 중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이죠빌라도의 관정에는 유대인들이 안따라 들어갔어요왜냐면은 그 유대.. 그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면 자기들이 불결해질까봐과월절이거든요참, 인간들이 그래요예수님만 보내놓고 빌라도가 이제 심문하는 거예요그리고 밖에서 기다려요

그러니까 빌라도가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거예요빌라도도 참으로 불쌍하죠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썼던 사람이에요그래서 성경이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 주기를 '힘썼다라고 이야길 해요.

 

(요한19:12)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줄 기회를 찾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유다인들은 '만일 그자를 놓아 준다면 총독님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누구든지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카이사르의 적이 아닙니까?'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해당하는 그 어떤 범죄 행위도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빌라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고발사건은 그냥 식민지 유대 이스라엘 안에서 그냥 종교다툼 정도로만 보였을 거예요그래서 빌라도는 될 수 있으면 그 사건을 유대인들의 그 자체 재판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로 떠밀어 버리려 했던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막무가내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를 외치면서 예수님의 사형을 요구한 거예요. 계속 풀어 줄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계속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랬어요빌라도가 그럼 곤장으로 몇 대 때리고 풀어 주겠다라고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안된다 죽여라' 그랬습니다.

성경은 '빌라도가 폭동이 두려워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렸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어요이 '폭동'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단어예요마태복음으로 가서 그 병행구절들을 한번 읽어 보죠.

 

(마태27:21-26) 21 총독이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놓아 달라는 말이냐?' 하고 묻자 그들은 '바라빠요하고 소리질렀다. 22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예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자 모두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23 빌라도가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으나 사람들은 더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24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25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하고 소리쳤다. 26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게 한 다음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 주었다. 27 총독의 병사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들어 가서 전 부대원을 불러 모아 예수를 에워쌌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얘긴지도 모르구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24절을 보면 빌라도가 자기 아내의 꿈 이야기도 있고 해서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손을 씻으면서 사형언도를해요

그런데 그 이유가 '폭동이 나려는 것을 보고' 죠  성난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리지 않으면 폭도로 변해서 빌라도의 총독부를 공격할 기세로 그렇게 무섭게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한 거예요총독이 두려워할 정도로..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해요 세상은요지금 유대인들은 세상 전체를 상징적으로 모형화하고 있는 거 거든요세상은 그런 연약한 하느님을 미워합니다 죽도록 미워해요.

빌라도는 굉장히 당시의 유대 총독이었지만 굉장히 아주 부실한 군대를 갖고 있었어요. 예전에 터키에 있는 성 소피아 사원에서 빌라도가 시저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가 발견되었죠그 보고서가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는데, 

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빌라도는 치안을 담당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부실한 군사를 갖고 있었다 그래요그래서 그런 병력으로 유대 사람들을 다 장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비위를 슬슬 맞춰 주면서 그렇게 통치를 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고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내준 거예요자기가 살라고 무고한 사람 아무리 봐도 죄가 없는데 '죽여라 죽여라하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 '그래 죽여라 옛다 죽여라그러고 내 줘버린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었음에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하느님이신 그 분을 죽음의 자리로 밀어 내버린 자아 숭배교에 빠진 세상사람들의 대표격으로 성경 안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자예요.


오늘 본문 37절과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라고 하자 빌라도가 '진리가 뭐냐?' 라고 물어봐요 그거는 진리가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에요. '진리가 뭐냐?' 궁금해서 물어 봤으면 듣고 나가야죠. '진리가 뭐냐?' 그래놓구 그냥 나가 버렸어요그건 뭐예요'진리가 밥 먹여주냐?' 란 뜻이에요헬라어 원어로 보면 '진리가 밥 먹여주냐그런데진리를 아는 자가 지금 이 꼴이냐?이렇게 조롱하고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빌라도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냥 눈에 보이는 현상이요 만질 수 있는 상황이 진리예요세상 사람들의 진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질 수 있는 상황 이게 진리예요. 그러한 자들을 '세상사람'이라 그래요반대로 '진리에 속해 있는 자 '그런 자는보이지 않는 하느님나라를 보는 자'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그걸 '성도'라고 하죠

이러한 예수님의 재판 장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폭동'이라 그랬어요빌라도가 그 폭동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했다 그러잖아요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식민지하에서의 폭동식민지하에서의 총독부를 향한 폭동은 곧 뭐를 의미하는 거죠모반이요반역뒤집어엎어 독립운동을 하겠다라는 것이지요

식민지하에서의 폭동은반역은 반드시 뭘로 처형해야 돼요십자가로 처형해야 돼요그래서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은 거예요 유대인들이그런 일 한 적이 없는데 십자가에 죽어도 달아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아버린 것이죠?

그 폭동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참 이스라엘의 회복 즉 구원에 관한 메세지가 암시되고 있어요그걸 우리가 잘 새겨서 캐취해서 봐야 돼요유대인들은 대단한 민족주의자들 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그러한 민족주의자들이 남의 나라 식민지로 있을때 그들에게 있어서 자주독립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컸겠어요그들이 수백만 명씩 디아스포라로 각 나라에 퍼져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이 굶고 있으면 그 사람들이 집단으로 그 사람을 도와 갖구요 유대인 거지가 없었어요

민족주의자들입니다민족과 나라를 그렇게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그런 사람들이에요그래서 로마의 지배하의 유대땅에서는 수없이 많은 폭동이 일어났다 그래요그건 역사서에 다 나와 있어요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하고는 쨉이 안될 정도로 그때 당시에 유대인들의 폭동은 엄청나게 많았어요.

조금이라도 특별한 재능과 지도력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유대인들은 마치 습관처럼 그 사람을 메시야로 추앙했다 그래요그만큼 메시야를 기다려왔던 거예요 민속메시야지만메시야를 그렇게 기다렸던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특출난 사람이 나타나면 유다마카베오처럼그에 버금가는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추앙해서 그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병력을 만들어서 폭동을 일으키고 했던 거예요성경에도 그런 폭동(민란)을 일으켰던 지도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한번 볼까요사도행전 5장 보세요.

   

(사도5:36-37) 36 이전에 튜다가 나타나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자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그러나 그가 살해되니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자취도 없이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37 그 뒤 호구 조사를 하던 때에도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타나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한 일이 있었지만 그가 죽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거 가밀리엘이 이야기한 거거든요바오로의 스승이죠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美門에 앉아있다 앉은뱅이를 일으켰어요그랬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아주 바글바글 모였어요사람들은 아주 기적에 맥을 못추죠바글바글 모였을 때 베드로가 설교를 해요

그 때 이 예수님을 때려 죽였던 이 유대의 권력자들이 그들을 체포해 버립니다그리고는 너희들 예수의 복음을 이야기하지 말아라 그래요그때 베드로가 그러죠불과 얼마 전에 예수님을 세 번 저주하며 부인했던 베드로가 내가 하느님의 말을 쫓는 게 옳으냐니들의 말을 듣는 게 옳으냐? 라고 이야기를 해요나는 내가 본 거 보고 들은 걸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그런데 무슨 죄목으로 가둘 수가 없어서 풀어줬어요 단단히 경고하구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또 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또 잡혀 왔어요산헤드린 공회에 잡혀왔어요 이번에는 감옥에 넣어 버렸어요. 그런데 주님의 사자(천사)가 와 가지구 감옥을 열어줘 버렸네요나가서 또 복음을 전해줬어요또 잡혀 왔어요그때 산헤드린 공회에서 '저 놈들 죽이자!' 그랬을 때 가말리엘이 한 이야기에요 이게.

'지금 유대에 많은 지도자들 그 폭동(민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일어났다가 또 죽고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냐~그들도 만약에 하느님이 세운 자들이 아니면 그렇게 사라질 거니까 우리가 괜히 손에 피 묻히고 죽이지 말고 한번 놔둬보자~' 그런 거예요 가밀리엘이

그만큼 그렇게 그냥 아무런.. 무슨..이야기 도중에도 이름들이 툭툭 떠오를 만큼 그렇게 폭동을 주도했던 그런 독립운동가들이에요그런 사람들이 유대엔 굉장히 많았더라는 거예요한 군데 더 볼까요?

 

(사도21:37-38) 37 병영 문 앞까지 끌려 간 바울로는 파견대장을 보고 '한 말씀 드려도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그러자 파견대장은 '당신은 그리이스말을 할 줄 아오? 38 그렇다면 당신이 얼마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던 그 에집트 사람이 아니오?' 하고 반문하였다.

 

이 사람은 사천 명이나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이에요바오로를 그 사람으로 지금 오해하는 거죠보다시피 당시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가짜 메시야들이나 반란의 주동자들이 이렇게 여러 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한 반란의 주동자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그 시간에 빌라도의 감옥에 갇혀있었단 말입니다그게 중요한 거예요그의 이름이 '바라빠'예요그런데 이스라엘의 명절관례 중에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중 한 명을 사면해 주는 그런 관례가 있었어요이제 과월절이니까 하나를 풀어줘야 되거든요

빌라도가 그 관례를 들어서 죄수 한 명의 사면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에게 '누구를 풀어주랴?' 물어봤어요아니 딱 찝어서 '니네들 왕 풀어주랴예수 풀어주랴?' 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그랬더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렸다란 듯이 '저 사람말고 바라빠요!' 라고 외쳤어요.

 

(요한18:39-40) 39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 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 유다인의 왕을 놓아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었다. 40 그러자 그들은 악을 쓰며 '그자는 안 됩니다바라빠를 놓아 주시오하고 소리질렀다바라빠는 강도였다.

 

여기에는 마치 빌라도가 먼저 사면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기록이 돼 있는데 마르코복음을 보면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관례를 들어서 한 사람의 사면을 요구한 것으로 나와요 그게 맞습니다.그때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을 풀어주랴라고 물은 거예요왜냐하면 자기가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이 사람에게는 죄를 찾아낼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 사람을 풀어줘야 된다라고 생각했고 그들도 이 사람을 풀어주라고 이야기할 줄 알았어요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말고 바라빠'다른 사람을 풀어 달라고 이야길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렇게 빌라도로부터 그리고 헤로데로 부터도 완전히 무죄한 분임을 인정받은 분이에요그런게 성경에 괜히 적혀있는 게 아니에요그는 죄 없으신 분인데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더욱더 선명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 분이 빌라도와 헤로데에게까지 무죄한 분이라고 인정을 받았다는 걸 성경에 굳이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루가23:13-15) 13 빌라도는 대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14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이 사람이 백성들을 선동한다고 끌고 왔지만 너희가 보는 앞에서 직접 심문을 했는데도 나는 너희의 고발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죄상도 찾지 못하였다. 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 보낸 것을 보면 그도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한 것이 아니냐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에 해당하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리옷유다에게도 무죄한 분이란 인정을 받으세요.

(마태27:3-4) 3 그 때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자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그래서 은전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4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하였다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하고 말하였다.

 

그죠무죄한 분이렇게 예수님은 세상에게도 무죄선언을 받아내신 실로 무죄한 분이었다라는 걸 성경은 우리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주고 있어요 반복해서

그래서 빌라도는 당연히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풀어주세요.' 라고 요구할 줄 알았는데 유대인들이 완전히 빌라도의 기대를 뒤엎고 폭동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살인을 저지른 '바라빠를 풀어 주세요그러는 거예요.

성경을 봐서 알겠지만 빌라도가 석방 대상자 명단을 주고 이 중에 하나 골라라 그런 것도 아니고 미리 예고한 것도 아닌데 그들의 입에서 바라빠라는 이름이 먼저 튀어 나왔어요그건 유대인들이 이미 바라빠라는 존재의 이름과 그의 행적을 다 알고 있었다 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거예요그 사람들에게 바라빠가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명절에는 반드시 한 명씩을 사면해 주는 관례가 있으니까 그때 바라빠를 살려내자는 무언의 합의가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것입니다바리새인들과 율사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런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거예요그러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라빠요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라빠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반란의 주동자들인 드다 갈릴리 유다 등에 못지않은 굉장히 유명한 반란 주동자였다라는 말이에요그건 아주 중요한 fact거든요극심한 민족주의자들이 폭동의 주동자를 식민지 하에서의 반란의 주동자를 어떤 사람으로 취급했다구요그 민족의 '메시야'로 취급했다니깐요로마의 항거하여 화려한 이스라엘 왕국을 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을 성취할 '메시야'로 추앙했단 말이에요.

*지금 유대인들은 진짜 메시야를 약해빠진 모습으로 온 진짜 메시야를 내어주고 가짜 메시야를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한 대조는 바라빠의 이름에도 암시가 되어 있어요바라빠라는 이름은 아바'가 아버지고그러니 '아버지의 아들' 이에요'인간 세상의 아버지의 아들메시야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이 그 참 아버지의 아들을 죽이고 이 세상 아버지의 아들을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내어주고 사람의 아들 바라빠아버지 다른 아버지의 아들을 살려내고 있는 것입니다이건 아주 중요한 대조예요.*

바라빠와 예수는 이 세상의 거짓 메시야와 하늘의 참 메시야의 대조인 거예요아울러 이 세상은 어떤 메시야를 원하며 어떤 메시야를 배척하는지가 역사적 사실로 증명이 된 사건이 바로 바라빠의 석방사건인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유대의 독립을 위해서 반란을 주도했던 바라빠가 유대인들에게 주려 했던 게 뭡니까유대인들이 오매불망 원했던 황금으로 도배가 된 다윗왕국의 재건이에요화려한 다윗왕국의 재건 식민지 시대의 반란은 독립운동과 똑같은 거였단 말입니다. 

따라서 바라빠는 한 마디로 이 세상의 힘과 권력과 재물과 인기를 추구했던 말 그대로의 민속 메시야 역할을 했던 사람이에요그런 바라빠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려 내어서 자기 곁에 두려 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거죠.

왜냐하면 자신들이 철썩같이 메시아라고 믿었고 일주일 전에 호산나호산나외쳤던 그 사람은 지금 자기는 어느 나라 왕이라고 그러면서 내 나라는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구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라구 그러구 엉뚱한 소리만 해대고 있단 말입니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반란을 주도하여 그 과정 속에서 살인까지 저질렀을지라도 힘을 가진 바라빠가 낫겠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힘의 원리 속에서 예수를 버리고 세상을 택하고 있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가짜 교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교회 안에 이 모습이 그대로 들어와 있는 거예요.

 

(요한18:36-37)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 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37 '아뭏든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하고 대답하셨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가 그러죠. '진리가 뭐냐진리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야?' 그렇게 물어본단 말입니다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래요그러니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닌 곳의 왕인 그도 이 세상에서 지금 연약한 모습으로 은닉되어 있는 거예요세상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봐요못 알아봐요당연히 바라빠를 선택할 수 밖에 없어요.

그때 당시에 그 유대인들을 향해서 손가락질 하면 안돼요우리는 지금도 바라빠를 택하고 있잖아요?우리가 무슨 개뿔이나 예수를 택합니까바라빠를 택하지. 매순간눈에 보이는 나의 유익을 택하지 예수의 영광 하느님의 영광을 택해요우리가아니잖아요이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에요그대로 들어와 있는 거예요 성당에요.

 

이런 시점에서 한번 여쭤 볼게요초라한 왕 예수님을 앞에 두고 바라빠의 이름을 환호했던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 우리 자신을 한번 넣어 보자구요보이지 않는 나라의 왕이라고 자처하면서 초라한 죄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과 살인도 불사하며 우리에게 이 세상의 다윗왕국을 재건시켜서 선물해 주겠노라고 호언하는 그런 바라빠.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세상의 이 화려한 왕국을 선물해주기 위해 그 자신이 살인도 불사하는 그런 희생적인 바라빠

그와 말만 보이지 않는 하느님나라가 있다 그러구 자기는 왕이라구 그러는데 실컷 뚜들겨 맞구 막 눈탱이가 이렇게 밤탱이가 돼서 우리 앞에 연약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 예수둘 중에 누굴 택하시겠어요솔직해지자구요둘 중에 누굴 택하시겠습니까?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바라빠를 택할 수 밖에 없어요우리는 그걸 인정해야 돼요자꾸 그걸 감추느라고 우리가 율법 뒤로 숨어서 지금 우리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지금 착각하고 있는데 거기서 나오란 말이에요 빨리.

한 쪽에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그리고 은닉성과 부재성 그리고 연약함으로 무력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와 계신 하느님 나라의 왕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고 이 세상의 오감으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그런 나라그리고 그런 나라의 풍요 또한 '언약(계약)'으로만 주어져 있어요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어요 들을 수도 없어요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고 마음으로만 볼 수 있어요이 땅에서 믿음과 희망으로만 볼 수 있는 불가시적인 것이에요.

반면에 그 반대쪽에는 강력한 힘과 계획과 의지를 가진 이 세상의 왕이 있고 그가 (싸우겠다고 하는 나라는 가시적으로도세우겠다고 하는 나라는 가시적으로도 오감으로도 느끼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그런 나라고 그 나라의 풍요 또한 감각적이며 물질적인 거예요.'이 마귀의 나라. 

이 세상의 나라그것과 '예수의 나라둘 중에 어느 걸 더 원하시냐구요 오늘날 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바라빠를 택한 것 같지 않으십니까보이지 않는 나라를 약속하는 예수와 보이는 다윗왕국의 회복을 비젼으로 제시하는 바라빠.

 

사실 예수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그리 큰 매력이 없어요그래서 우리는 서슴없이 바라빠를 선호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돈 명예 건강 자식 인기 등등 매력있는 바라빠의 열매를 우리는 열망하죠그러면서도 그 바라빠의 이름을 부르면 굉장히 불경스러워서 그 바라빠의 이름을 예수라고 바꿔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냥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그걸 야훼라고 부른 출애굽 당시의 그 이스라엘과 똑같은 모습인 거죠.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들에게 '그럼 야훼를 한번 만들어 봐, 니들 마음속에 있는 그 야훼를 형상화시켜서 만들어 볼래?그랬더니 금방 들통나요. '풍요의 신 금송아지탁 만들어 내는 거예요.

생각해 보자구요병이나 낫고 부자되고 나에게 명예나 갖다주고 인기나 갖다주는 그런 '바라빠'를 우리는 '예수야훼 하느님!' 이렇게 부르고 있는 거 잖아요더 나쁜거에요 이 사람들보다그래서 우리삶에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뭐가 잘나서 지금 그 하느님나라를 희망으로 문득 문득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하느님이 개입하셔서 밀고 들어와 버린신 거예요 우리의 삶 속에우리는 계속 바라빠만 바라빠만 선호하고 있거든요그리고 예수라고 이름은 부르는데 그 실체는 계속 바라빠예요금송아지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뚫고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그리고는 가짜 예수인 바라빠를 계속 밀어내고 그 자리를 하느님 나라로 채워가는 거예요그걸 신앙생활 이라고 하는 거예요. 

빵을 원하여 찾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지도 않는 하늘의 빵을 말씀하시는 예수빵 달라고 수만 명이 찾아 왔어요 오병이어 먹고.. 그랬더니 '나는 보이는 빵주러 온 사람이 아니야나는 하늘의 빵 주러 왔다니까?' 그러구 도망가 버리셨어요

칼을 들고 싸우려는 제자들을 막아서서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그러더니 자기가 죽어 버렸어 왕이.  은닉성과 부재성을 몸소 실천하여 죽어버렸어요그 왕을 누가 선택하냐구요 도대체가!

착한 일 많이 하고 율법 열심히 지켜서 하늘의 복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살 길은 그 길이 아니니까 피만 의지해야 돼라고 자존심을 확 긁어 버렸어요. '니들은 못한다니까 니들이 내어놓는 건 그건 다 꽝이야그러니까 내 피만 의지해야 돼라고 자존심을 왕창 짓밟아 뭉게 버렸어요.

'그래 잘한다 잘한다 더 열심히 해 하느님이 기뻐하실거야~' 격려해 줘도.. 좋을까 말깐데.. 완전히 자존심을 뭉게버리고 '니들이 하는 건 다 악이야 자기 의로움이야 위선이야이렇게 이야기 해 버리는 거예요.

너희들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너희들의 처음자리원래의 자리 자비의 자리그 핏덩이의 자리무력한 자리어머니로부터 생명선이 끊어져 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시체의 자리 그게 처음자리예요그게 자궁의 자리예요 죽은 흙의 자리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우리의 모습

그 자리로 우리가 내려가야 된다라고 그 하늘의 왕이 이 땅에 오셔서 '내 피만을 의지해야 돼라고 에둘러서 이야기를 해 버리시는 거예요그러니 누가 그 왕을 좋아하냐구요다들 자기가 선악과 따 먹고 하늘처럼 높아져 있는데 '내려가내려가!' 그러구 위에서 짓밟아 버리는 거예요.

'니들이 하긴 뭘 해내려가너희들은 은총만 의지해야 돼피만 의지해야 돼 예수의 피만 의지해야 돼그러구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하느님처럼 된 인간들은 '은혜'를 제일 싫어해요자존심 상하거든요아담과 하와가 자존심 상해서 선악과 따먹은 겁니다'왜 내가 하느님 말만 들어야 돼?' 뱀이 그렇게 미혹했잖아요. '너희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어왜 너희들이 하느님 말만 들어야 되니?' 은혜를 제일 미워해요 죽은 흙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그 처음자리로 내려가서 너희들은 왜 어머니 자궁 속에서 어머니로부터 생명선을 연결 받아야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배우라고 그 무력한 자리로 밀어 내리는 거예요.

자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처음자리 죽은 흙의 자리'로 계속 밀려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그게 '자기 부인'이라는 거예요그리로 밀어내리셔서 나는 죽은 거구나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 나는 그냥 죽은 흙이구나 티끌이구나 낫띵nothing이구나 하벨이구나

그래서 여기에 은혜가 쏟아 부어져야 그 쏟아지는 은혜 그걸 하느님의 생명력이라고 하고 그걸 '바라크. 복'이라고 하잖아요이 복을 받아야 비로소 나는 생존할 수 있고 거기서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 거구나를 배우는 걸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그런데 이걸 연결을 못시키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더 설명하라는 거예요 그럼 도대체.

옛날엔 개뿔도 몰랐었잖아요마찬가지예요계속 성장을 해야죠언제까지 엄마쭈쭈엄마찌찌 이 소리만 들을 거예요계속 웅얼거리는 옹알이로 말(설교)을 해달라는 거예요?

우리는 여전히 바라빠를 원하는 이 시대의 바라빠들이에요 우리가바라빠가 추구하는 걸 나도 추구하고 있거든요그리고 나의 메시야로 바라빠를 요구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잖아요.

 

마귀가 뭐라 그랬어요마귀는 실존하는 하나의 존재지만, 마귀는 바로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피조물들의 상태와 그들의 추구이게 다 마귀예요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그걸 하나의 존재로 형상화시켜서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추구와 그들의 사고와 행위와 그들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해 마귀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 뿐이지 우리 전체가 다 마귀예요 마귀귀신들린 자우리가 모두가 다 그런 면에서 마귀..

우리는 마귀에게 속아서 마귀화되었지만 내 자체가 마귄 거예요마찬가지로 우리는 바라빠를 요구하고 있지만 내 자신이 바라빠인 거예요나라는 바라빠가 연합이 되어 커다란 바라빠라는 하나의 세력이 되는 거예요나라는 마귀가 하나하나 모여서 하나는 마귀라는 세력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마귀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반역을 꾀하다가 쫓겨난 자들이죠반역이라는 죄가 우리에게 죄목이 우리에게 붙여집니다맞습니까그리고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떠난 자들은 이제 자기 힘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되기 때문에 하느님과 다른 이들까지도 경쟁자요 적으로 간주해야 돼요

그래서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없어요성경에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걸 뭐라 그러죠살인이라 그럽니다그럼 반역과 살인바라빠의 죄목이 '폭동' '반역과 살인'이었어요내가 바라빠인 것입니다성경은 바라빠를 통해서 우리를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은 그 바라빠를 원해요그런데 예수가 그 바라빠의 죄 '반역과 살인'이라는 바라빠의 죄를 덤터기 써버리고 바라빠를 풀어줘 버리는 거예요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그게 '복음'인 거예요. 내 안에 있는 바라빠선택된 자들의 안에 있는 바라빠는 그렇게 해서 상쇄가 돼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갖고 품고 있는 그 바라빠는 반역과 살인죄를 가지고 죽음으로 떨어져 버리는 거예요나는 똑같은 바라바인데 예수님이 내가 갇혀있는 감옥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나를 풀어주고 자기가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버렸어요반란을 일으켰던 바라빠는 십자가입니다 바로.

 

그런데 바라빠가 풀려나고 하느님의 아들이 그 십자가에 달리는 거예요구원은 그렇게 폭력적이에요감옥으로 밀고 들어오더니 '나가!' 그러는 거예요이유도 모르겠어요 영문도 모르겠는데 '나가!' 그러는 거예요그리고는 당신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그게 은혜의 폭력성입니다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은 거예요죽은 흙의 자리에서 그렇게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과 진행방법은 이미 창조이전에 하느님의 작정 속에서 결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어요그래서 그 모든 일들이 다 하느님의 예정과 작정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라는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이 돼 있었던 것이었던 거예요. '빌라도와 헤로데가 하느님의 예정을 이루기 위해 거기에 모이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잡혀간 그 자리에 그 감옥에 어떻게 바라빠가 거기 갇혀 있냐구요우연이겠습니까예수님이 어떻게 은 삼십 냥에 팔리죠우연입니까예언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던 거 아닙니까어떻게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죠우연인가요아니에요~

예수님이 빵을 찍어다 주면서 '얘야 니가 할 일을 하라하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라는 말이 있죠사탄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빵을 먹자마자 쏙들어간 거예요?  아니에요 그렇게 만화처럼 성경을 보시면 안돼요

모든 일의 주도권을 예수가 쥐고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심지어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가는 시점까지도 하느님이 다 붙들고 계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찍어 주면서 '니 일을 해그러니까 '사탄이 들어가더라이건 모든 게 지금 하느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라는 걸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이 팔리고 그 은 삼십 냥을 유다가 다시 성전에다 갖다 집어 던지고 그 성전에서 은 삼십 냥이 다시 그 제사장들에 의해서 옹기장이에게로 가고이건 성경에 낱낱이 다 기록이 되어 있어요수백 년 전에 이미그리고 그 성경을 이루게 할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 라고 이 사도들이 또 기록을 하고 있구요.

그럼 뭐예요. 다, 하느님이 계획해 놓으셨다라는 뜻 아닙니까그래서 은혜를 폭력적인 것이다 라고 감히 표현을 한 거예요하느님의 은혜는 계획은 그 어떤 타협도 그 어떤 거래도 용납하지 않아요그리고 그 어떤 거부나 애원과도 상관이 없어요결정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거예요그게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 인간이 무슨 행위를 보탠다는 거예요우리가 어떤 행위를 보태서 그 물줄기를 바꿀 수가 있습니까안된다니까요.

 

(사도4:27-28) 27 과연 헤로데와 본티오 빌라도는 이 도성에서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작당하여 주께서 기름부어 그리스도로 삼으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렀습니다. 28 이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해 두신 일들을 모두 이루었습니다.

 

하느님이 결정해 놓고 예정해 놓은 것그것을 이루려고 그들이 하나하나 기어 들어오더라는 거예요우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니라우린 계속해서 바라바를 원하고 스스로도 바라바이고 싶어하는데 보이지 않는 나라의 보이지 않는 왕이 우리의 연약한 눈과 귀를 열어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을 사모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하느님의 편애와 선택 속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핏값을 쓰레기 취급하면서 발로 차서 계속 토스해 버려요자기는 싫다는 거예요왜 자기같은 능력있는 사람이 그 바보같은 은닉성 부재성 (부재성은 낫띵 nothing이라는 뜻이거든요? '없다라는 거예요 아니 '존재할 '') 그래서 부재 무소부재에서 그 부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재성.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부재성그런 은닉성과 부재성을 갖고 있는 그러한 은혜왜 그걸 의지해야 되냐는 거예요거기에 대한 좋은 예가 요한복음에만 빠져있는 유다의 자살사건에 잘 나오거든요이왕이면 요한복음을 우리가 공부하고 있으니까 그 자살사건 빠져있는 자살사건을 제가 예로 들어서 한번 설명을 해 드릴게요.

 

(마태27:3-10) 3 그 때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자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그래서 은전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 주며 4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하였다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하고 말하였다. 5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 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6 대사제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 '이것은 피값이니 헌금궤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하며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8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의 밭이라고 불린다. 9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정한 한사람의 몸값은전 서른 닢을 받아서 10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옹기장이의 밭값을 치렀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사이에 지금 요 내용이 들어가 있어요유다의 자살사건이.  요한복음에는 고게 싹 빠져있단 말입니다은 삼십이라는 건 구약의 율법에 기록된 사람의 목숨값이죠그것도 아주 낮은 천한 종의 몸값그게 은 삼십이에요.


(출애21:32) 32 황소가 남의 남종이나 여종을 받았으면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물어 주고 황소는 돌로 쳐 죽여야 한다.

 

당시에는 종 한사람의 몸값이 은 삼십 냥이었어요그거 큰 돈 아닙니다그래서 소가 종을 받아 죽이면 종의 몸값인 은 삼십 냥을 물어줘야 됐던 거예요그러니 은 삼십 냥은 보잘것 없는 종의 핏값이에요바로 종된 우리의 몸값!  생명값!  그것으로 은 삼십 냥이 책정이 된 거예요그렇게 은 삼십 냥에 신랑의 품으로 돌아온 여자가 있습니다누굽니까고멜이죠?

 

(호세3:1-2) 1 야훼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 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에게 마음이 팔려 건포도 과자 따위나 좋아하는데도 이 야훼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사랑해 주어라.' 2 나는 은 열 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그 여인을 산 뒤에, 3 이렇게 일렀다. '당신은 내 아내니다른 남자와 어울려 불의한 관계를 맺지 말고 들어 앉아 있으시오그렇게 오래 지낸 뒤에야 당신과 한 자리에 들리다.'

 

고멜은 창녀죠그런데 창녀를 데려다가 신부를 만들어 놨더니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계속 창녀 짓을 하는 거예요그럼에도 하느님은(호세아를 헬라어로 바꾸면 예수라고 그랬어요 여호수아 호세아 다 예수라는 말이에요.) 호세아를 시켜서 그 창녀를 은 열다섯 냥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사오라고 그래요. '한 호멜'이라는 건 '10 에바'거든요? '한 에바'가 '은 한 세겔'이에요.

 

(예제45:11) 11 에바와 밧은(도량형) 용량이 같다밧도 한 호멜의 십분의 일이요에바도 한 호멜의 십분의 일이다호멜은 부피를 재는 표준이다.

 

한 에바가 한 세겔이니까 한 호멜은 10세겔이에요호멜 반은 15세겔그러면 은 열다섯과 또 은 열다섯 (한 호멜 반이니까합이 삼십그러면 고멜의 몸값이 얼마였다 라는 거죠은 삼십그러니까 종의 몸값으로 율법에 정해졌던 은 삼십 세겔 고멜의 몸값으로 책정된 은 삼십 세겔 예수님의 몸값으로 주어졌던 은 삼십 냥 똑값은 거란 말입니다.

바로 목숨값이에요우리 목숨값이에요그런데 하도 보잘것 없는 존재라 은 삼십밖에 안되는 거예요창녀값이에요 그건요 우리가 창녀니까이 세상과 늘 간음하고 있는 창녀니까 다그래 놓고도 그냥 몸 파는 여자들 창녀들 보고 손가락질하면서 저런 더러운 년이러는 게 우리 모습 아닙니까우리가 창녀면서!

그러니까 그 그림은요 예수의 핏값으로 창녀인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신부로 구속이 되는 그림인 거예요그 예수님의 대속의 핏값인 은 삼십 세겔이 유다에게로 가요그 핏값은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예수님의 핏값이거든요받아서 내 걸 삼아야 돼요그래야 내가 살아요.

내가 저지른 살인과 반역의 죄가 죄값이 은 삼십 세겔이면 해결이 된다니깐요그게 예수의 핏값이기 때문에!  율법에 나와 있잖아요그런데 유다가그걸 토스해버려요누구에게대제사장들에게도로 갖다 줘버려요.

괜히 갖다 주는게 아니에요하느님의 은혜의 그 편애 안에서 제외된 이들은 그 핏값을 받을 수가 없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대제사장들에게 토스해 버리니까 대제사장들은 엉금엉금 이렇게 기어서 그거 하나 주섬주섬 모아 가지구 다시 또 토스해 버려요안 가져요.

 세상은 절대 그런 자기의 자존심을 묵살해 버리는 예수님의 핏값을 원하지 않아요스스로 할 수 있다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든요. '괜찮다'는 거예요당신이 그렇게 까지 안 도와줘도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이죠그걸 ''라 그래요.

그걸 기특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그게 가장 무서운 죄라니깐요하느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가 나는 하느님의 은혜 없이도 내 힘으로 한번 무언가 해 보겠어요 라는 바로 그 마음을 ''라 그래요하마르티야그게 가장 무서운 거예요

자 그렇게 힘의 원리 속의 세상은 절대 나약한 예수를 원하지도 않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도 폭로당하고 싶어하지 않아요그래서 예수님의 핏값이 주어지면 내동댕이 쳐 버려요.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핏값을 내동댕이 쳐버렸던 유다와 대제사장의 특징이 성경에 나오는데 참 재밌습니다마태복음 27장 3절에 보면 유다가 은 삼십을 던지면서 뭐라는지 아세요스스로 뉘우쳐 회개를 해요도덕과 윤리와 양심으로 선한 모습을 보이면서 은 삼십을 던져요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마르코복음 14장에 가보면 대제사장이요 예수님이 '내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옷을 찢습니다. 그게 율법에서 행하는 회개의 행위거든요하느님에게 하느님을 향하여 이 놈이 무례한 짓을 했다고 자기가 대신 회개를 하는 거예요대제사장이 옷을 찢어요. 

율법과 도덕과 윤리와 양심으로 회개를 하는데 그들 둘이 은 삼십을 던져버려요은혜를 던지는 이들은 폭력적인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은 반드시 자기의 도덕과 윤리와 율법과 양심을 의지하게 되어 있어요반드시이게, 성경 전가 이야기하고 있는 바예요.

 

보세요 딱그 두 사람이 율법과 윤리와 도덕과 양심으로 회개를 한다니깐요종교행위를 한단 말입니다하느님은 그들을 제일 미워하시는데 그들이 우리가 볼때 굉장히 경건해 보이는 듯한 종교행위를 한다구요그리구 굉장히 선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법한 뉘우침을 내어놓고 있다니깐요?

우리가 이걸 주의깊게 봐야 되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의 차이그거 잘 분별해야 돼요율법과 양심과 도덕으로 단단하게 무장된 대제사장들과 가리옷유다는 남자다운 모습과 경건한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서 멋지게 액션을 취했어요멋있는 거 아니에요내가 내 양심을 따라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그거 양심에 따라 죽은 거거든요양심은 뭐예요하느님이 마음속에 새긴 율법이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율법따라 죽은 거예요내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니까 무죄한 자 팔았으니까 나 죽을래그런데 그를 지옥 보냈단 말입니다 하느님이. 양심에 따라 살았는데 지옥에 보내 버렸어요얼마나 남자다워요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의 편애에서 제외된 이들은 그렇게 멋진 종교행위와 멋진 율법지킴 멋진 선한 삶 그런 삶을 내어놨는데 하느님의 은혜에 잡혀있는 이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쪼다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누가 밀고 내려 가시냔 말이에요 그거를하느님이 밀고 내려 가신다니깐요?

 

'죽은 흙들아.. 니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그 자리에서 알아 먹으라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 자리에서 알아먹으라는 거예요그러니 하느님이 우리를 밀고 내려가세요 계속하느님의 말씀으로 불도우저처럼 오징어포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를

그리고는 거길 덮는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케 해 주시는 거예요그래서 어줍지 않은 종교행위나 어줍지 않은 착한 행동 몇개 갖고 나는 신앙적으로 성숙한 이라는 둥 저 사람은 신앙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둥 이런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자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마태복음 27장 5절부터 다시 한번 읽어 볼게요.

 

(마태27:5-10) 5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 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6 대사제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 '이것은 피값이니 헌금궤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하며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8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의 밭이라고 불린다. 9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정한 한사람의 몸값은전 서른 닢을 받아서 10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옹기장이의 밭값을 치렀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대제사장들이 유다가 던져준 은 삼십 냥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 (이게 노숙자예요나그네들의 묘지를 삼겠다 그래요굉장히 착한 일처럼 보이죠이들이 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거길 나그네 노숙자의 묘지를 삼았는지 아세요유다를 감추기 위함이에요

자기들과 연관되어 있는 유다가 목매달아 죽어 버렸습니다자기들의 치부를 감추어 내야 돼요 감추어 버려야 돼요나그네의 무덤을 만들어 버려요그러고는 유다를 감추어 버리는 거예요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선행이라는 건 자신들의 더러운 죄악을 감추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한 거예요.

아니 어떻게 그 행동을 그렇게 폄하할 수 있는가아니 100프로 맞아요. 100프로 맞아요아무리 선한 이유를 갖다댄다 할지라도 100프로 맞아요그 선한 행위 뒤로 숨는 거예요 그들은요중요한 건 그 모든게 이미 즈가리야서에 예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라는 사실이에요.

 

(즈가11:12-13) 12 내가 그 장사꾼들에게 품삯을 주고 싶으면 주고말 테면 말라고 했더니그들은 은 삼십 세겔을 품삯으로 내놓았다. 13 야훼께서 나에게 그 후하게 받은 품삯을 금고에 넣으라고 하시기에 나는 그 은 삼십 세겔을 야훼의 전 금고에 넣었다.

 

'야훼의 전 성전'에서 '옹기장이'에게 던졌다 그래요그런데 보시다시피 마태오는요 그 내용이 예언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라고 기술을 하고 있어요잘못 쓴거죠마태오가 응예레미야서에는 이런 말씀 없어요.

 즈가리아서에서만 나오는 말이거든요그런데 왜 마태오가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아무리 주석서를 찾아봐도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게 없어요.

 그냥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가 마태오가 기억의 오류로 말미암아 잘못 기록했음. ^^ 왜냐면은 즈가리야서에 분명히 이렇게 나오는데 예레미야서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거든요그러니까 잘못 기억한 거라는 거예요그러면 성경의 무오성까지도 흠집이 나는거죠정말 그렇겠습니까?

 

마태오의 기억의 오류 그리고 성경의 오류다라고 하는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정말 언급의 가치도 없는 거예요가장 지금 이 부분에 대한 근접한 해석을 해 놓은 견해라고 쳐지는 게 '마태오가 즈가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종합하여 즈가리야와 예레미야를 대표하는 예레미야만 쓴 거다이렇게 해 놨는데 너무 억지같지 않아요그래서 제가 성경 문맥을 보라고 그러는 거예요.

마태오는 분명 즈가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예언을 모두 다 알고 있었어요그리고 그 두 예언서의 내용이 유다의 자살사건과 은 삼십 냥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산 사건 속에서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보면서 당시의 현실이 하느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을 거예요그래서 이것이 예언서의 성취다 예언의 성취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왜 예레미야의 이름을 썼냐면 마태오가 본 유다의 자살사건과 그 은 삼십 냥 그리고 옹기장이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지금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옹' 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예레미야의 이름만 쓴 거예요. 은 삼십 냥과 옹기장이의 이야기의 비유는 즈가리야서와 예레미야서를 합쳐져야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가 되거든요.

그런데 지금 마태오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건 예레미야서에서 강조가 된 옹기장이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옹기장이'가 뭐예요? '하느님의 주권'을 얘기하는 거예요예레미야 18, 19, 32장을 읽어보면 옹기장이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옹기장이의 이야기는 전부 하느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는 거 거든요한 군데만 보고 갈게요

 

(예레18:1-8) 1 야훼께서 나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2 '너는 곧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 가거라거기에서 너에게 일러 줄 말이 있다.' 3 말씀대로 옹기장이 집에 내려 가 보았더니옹기장이는 마침 녹로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그런데 옹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내다가 제대로 안 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빚는 것이었다. 5 마침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들려 왔다. 6 '진흙이 옹기장이의 손에 달렸듯이 너희 이스라엘 가문이 내 손에 달린 줄 모르느냐이스라엘 가문아내가 이 옹기장이만큼 너희를 주무르지 못할 것 같으냐야훼가 하는 말이다. 7 나는 한 민족 한 나라를 뽑아 뒤엎어 없애 버리기로 결심하였다가도 벌하려던 민족이 그 악한 길에서 돌아 서기만 하면 내리려던 재앙을 거둔다.

 

어떠세요하느님의 주권에 관한 이야기예요이 이야기를 바오로가 그대로 인용해다가 쓰는 거예요로마서로 가 볼까요?

 

(로마9:19-24) 19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24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마태27:9-10) 9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정한 한사람의 몸값은전 서른 닢을 받아서 10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옹기장이의 밭값을 치렀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자 보세요예수님이 유다에게 유다에 (의해팔리신 것과 그 분의 몸값이 은 삼십 냥으로 정해진 것 유다가 자살한 것과 그 은 삼십냥이 다시 옹기장이에게로 귀속이 된 것 모두가 다 하느님에 의해 계획이 되고 이미 정해져 있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태오가 지금 예레미야의 이름 하나만 쓰고 있는 거예요그렇게 하느님의 은혜는 '편애성'을 갖고 '폭력적'으로 어느 한 부류에게만 밀고 들어온다라는 걸 마태오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것 때문에 그 하느님의 편애 때문에 그 하느님의 '예정때문에 유다는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거야 이렇게 당당하고 멋지게 죽었지만 그는 유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는 거예요그게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마태27:9-10) 9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정한 한사람의 몸값은전 서른 닢을 받아서 10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옹기장이의 밭값을 치렀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느님이 이미 명해 놓으신 거예요그리고 그것이 착착 진행되어져 가고 있는 거예요때가 되니까 바라빠가 들어가 있고 때가 되니까 유다가 예수를 팔고 때가 되니까 은 삼십이 들어오고 때가 되니까 은 삼십이 토스되고 때가 되니까 은 삼십이 옹기장이에게로 가요자 결국 그 은 삼십이 누구에게로 갑니까?

최종 정착지가 어디에요? 옹기장이죠. 옹기장이는 누구하느님하느님에게서 나간 게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들의 알리바이를 접수해 버리고그들이 다 토스해 버렸잖아요그 은 삼십이 쭉돌면서 세상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다 접수해 버려요그래놓고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요그리고는 그 은 삼십이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계속 그걸 벗어버리고 싶어요이 연약한 은 삼십나의 자존심을 긁는 은 삼십나두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은혜만 의지하라고 그래 이거 자꾸 토스하고 싶은데 우리에게 들어온 은 삼십은 나가질 않아요.

세상 사람들에게 갔던 은 삼십은 그들의 알리바이를 접수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데 우리에게 찾아 들어온 은 삼십은 나가질 않아요우리 안에 있는 바라바를 반드시 밀어내고 그 핏값이 우리를 사 버려야 돼요그 복음의 현실을 다이나믹하게 인생 전체에서 살아내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무슨 놈의 '소원과 비전과 야망'이 많아요뭔 기적들을 그렇게 바라세요?제가 자꾸 이렇게 얘기하니까 아이 강사님 설교 들으면 기도도 하기 싫고 희망도 없어지고... 왜냐면 기적.. 자기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기적이 일어나야 되는데 기적은 안된다고 그러니까 '아휴.. 그럼 이렇게 살다 죽어야 되나부다.. 희망이 없어진다그래요.ㅎㅎ

아니에요우리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그러나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백성들은 이 기적을 왜 의지하지 않는 줄 알어한 번 볼래보여주려고 나타나는 기적이에요안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건 예수 말고 내가 믿고 있는 다른 것을 다른 것에 대한 믿음을 다 놓는다는 얘기예요예수를 믿는다는 건예수를 믿고 다른 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그래서 맘모나스와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ONLY BY 그의 핏값! ONLY BY 그의 GRACE 그분의 은혜그것만을 꼭 붙들고 가는 거예요그렇게 은혜만을 의지하다 보면 그리고 그 은혜에 의해서 해체되다 보면 내 안에 있는 그 예수가 밖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내 삶에서 예수의 향기가 조금씩 풍겨나는 거예요아주 조금씩그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기록이 되어 있죠구약에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메세지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래 요구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를 알고 너희들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알아 그 은혜가 얼마나 꼭 필연적인 것이며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배우라고 구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얼마나 죄인인지 알아 먹으라고 그래서 초등학문인 거예요구약 율법이그리고 거기에다가 은혜가 은혜의 복음이 신약부터 쏟아부어지니까 '야! 어떻게 이게 가능해이게 안됐는데 하느님이 성전 문 닫아다오 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게 우리에게 부어지지?' 이 은혜가 더 크게 돋보이는 거예요.

 성경에 '하라라는 명령은 우리들에게 지켜내어서 반드시 성취하라구 주어진 게 아닙니다그건 하느님 나라에 가서 우리가 새 몸을 입게 되면 자연스럽게 될 것들이에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라하라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건 하느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아라 알아라 알아라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그렇게 너희들이 안되는 상태 속에서 어떻게 너희의 삶 속에서 그 '안는 삶 속에서 어떻게 되는 삶이 문득문득 나오게 되었는지'.. 그게 바로 너희 안에 부어진 새 생명 예수의 삶이 아니겠느냐이걸 우리에게 배우라고그렇게 '하라의 명령이 있는 거거든요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그 '하라'의 그 명령을 부담으로 갖는게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뢰와 믿음과 그리고 그 실수 속에서 실패 속에서 우리를 덮을 은혜로 다시 이거를 바꿔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돼요그게 믿음 아닙니까

모든건 은혜예요그걸 제발 알아먹고 이제 내 나라에 와서는 그 은혜 절대 떠나지마은혜 떠나지 말라는 말이 불순종하지 말라는 말이거든요선악과 먹지마 라는 말이잖아요선악과만 안먹으면 돼요하느님 말만 들으면 돼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렇게 수시로 선악과를 따먹는 프로베이션 기간을 지나고 있는 거예요선악과의 기간을 지나 생명나무로 들어가는 거예요생명나무는..... 예수는 생명나무지 선악과나무가 아니에요선악과나무는 행위로 점령하는게 선악과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우리에게 뚫고 들어와 우리의 피와 살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예수는 생명나무라니깐요그런데 예수를 선악과나무로 보고 그 예수를 내 행위로 점령해 볼려고 애를 쓴단 말입니다그걸 '자기 의라고 하는 거예요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스트레스가 쌓이고 늘 불안하고 조바심 나고 그러는 거예요안되거던요아니요.

우리는 생명나무와 예수에게 점령당하면 되는 거예요그렇게 우리 이 반역자이고 살인자인 우리에게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의 핏값을 요구하시는데 그 은 삼십이라는 핏값이 우리에게 들어와 대신 지불이 됐어요그래서 우리는 살았습니다세상 사람들은핏값을자기들이 지불해야 돼요!

 

(마태23:35) 그래서 마침내 무죄한 아벨의 피로부터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된 바라키야의 아들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흘린 모든 무죄한 피값이 너희에게 돌아 갈 것이다.

 

아벨과 즈가리야가 누구예요아벨은카인의 동생즈가리야는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이죠이스라엘이 패역하니까 여호야다의 아들 즈가리야가 가서 '회개하라그래요그런데 돌로 찍어 죽여 버립니다

아벨은카인이 왜 죽였다 그래요아벨이 의로워서 죽였다 그러죠세상은 그렇게 의로운 이 예수 안에 들어있는 의로운 이들을 찍어 죽여요세상이 예수를 찍어 죽인 것처럼그들은 은혜의 그 연악함 그 은닉성 부재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든요죽여요그리고 다른 이웃들도 원수요 경쟁자로 여겨서 죽여요그래야 자기가 살거던요그게 세상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살아요 사실은지금도 마찬가지죠 뭐이 경쟁사회 속에서 경쟁하면서 다른 이들의 핏값 피를 흘려 우리의 배를 채우고 있는 흡혈귀같은 삶 살잖아요 이겨야 되니까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 왔잖아요그런데 하느님은 반드시 그 핏값을 찾으시는데 보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흘리게 만든 핏값을 반드시 자기들이 받는다 그래요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살거든요그들은 영원히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거예요그게 핏덩이들의 삶인 거예요.

우리는은 삼십 냥이 우리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이미 지불이 되어 버렸다니까요그걸 믿기만 하면 돼요그걸 은혜라고 해요그렇게 은혜는 하느님의 덮으심인 거예요하느님이 덮으실라면 우리는 벌거벗겨져야 돼요.

자기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받았는지 그리고 지금도 자기는 어떤 존재인지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아니 자기에게 발각된 그런 더럽고 추하고 역겨운 모습을 남을 험담함으로 말미암아 그 험담 뒤에 숨는 거예요그런 마귀가 어딨습니까.

제발 부탁인데 남얘기하지 마세요우리가 창녀잖아요하느님과 이혼한 사람이잖아요누구 가정이 깨졌다고 욕할 것이며 누구보고 음란하다고 욕할 거예요누구보고 미성숙하다고 욕할 것입니까은혜를 아는 이들은 점점 바보가 될 수 밖에 없어요

점점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그런 무력한 자가 될 수 밖에 없어요그리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그런 사실인식사실이거든요그 속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제발 모여서 아름다운 신앙얘기를 하세요다른 사람 이야기하지 마세요. 은혜 이야기만 하세요그리고 그 은혜 복음 앞에서 폭로된 내 이야기.. ~직하게 인정하시면서그렇게 이냥 한발 한발 가는 거예요그게 신앙생활이지..

기도는 죽어도 안하면서그런 거 하지 마세요은혜로 구원받은 은혜 속에 있는 자들그게 바로 우리들입니다진짜 수지맞은 거예요~말 수지맞은 거예요그 예수님만 꼬옥 붙들어 보세요그 예수가 우리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혀 내는지 예수만 꼭 붙들어 보세요.

 

 무엇이 보입니까?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1코린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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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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