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녀 스콜라스티카 기념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09 조회수2,201 추천수11 반대(0)

3가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가족을 보았습니다. 10명이 넘는 가족이 성당 좌석 1줄을 채우고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손녀는 미사에 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들이 미사에 참례합니다. 매주 온 가족이 성당에 오는데 마치 잔치에 초대 받아 오는 것 같았습니다. 주일미사만큼은 온 가족이 함께 하자는 할아버지의 의견을 온 가족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학업 때문에, 아이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봉사를 하기 때문에 가족이 따로 미사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대학교에 갈 때 까지는 성당에 가지 않아도 눈감아 주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릴 때는 성당에 나오지만 대학교에 가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미사가 재미없어서 안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바쁘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신앙은 나중으로 미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 가족이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보니 마치 천연기념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당연했지만, 지금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아이의 출산을 집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의 출산은 대부분 병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연분만을 주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수술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신앙교육은 집에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성경도 읽고, 묵주기도를 같이 바쳤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 오면 연도를 하였습니다. 가족들의 이름은 세례명으로 불렀습니다.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신앙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어도, 성당에 가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으면 엄하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보다는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이 더욱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세상의 것들이 조금씩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에 스며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지혜로웠고, 백성을 사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세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고, 재물과 건강을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솔로몬은 이방인을 위한 성전을 세웠고, 이방인 아내를 위해서 하느님을 멀리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솔로몬 곁에 계셨지만 솔로몬이 하느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것이 솔로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만함으로 하느님을 멀리한다면, 이방인의 신을 섬긴다면 비록 왕일지라도, 기름을 부음을 받은 선택된 하느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하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교만과 허영의 늪에 빠져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불가의 조주 스님은 장례행렬을 쫓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산 사람을 수많은 죽은 사람이 쫓아가고 있구나." 경허 스님은 세속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 비추는 곳에 꽃 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육신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성찰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도, 우리가 떠나야 하는 그곳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한다면 굳이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성이 있었고, 임금이 살았던 곳이기에 중요한 곳이고, 갈릴래아는 호숫가이고, 어부들이 살았던 곳이기에 시골이라는 생각도 어쩌면 주관적인 것 같습니다. 갈릴래아는 많은 상인이 다니는 곳이고, 그곳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전해진다면 갈릴래아가 더 중요한 곳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전통과 율법을 고수하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변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시로페니카아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병든 딸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의사에게 딸을 데려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람 따라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성한 사람보다는 아픈 사람을 더욱 사랑한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 슬퍼하는 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부자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바리사이의 경건한 기도보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더욱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방인이었던 여인은 아픈 딸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여인의 뜨거운 신앙을 보았습니다. 딸을 위한 엄마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구원은 신분과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겸손과 열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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