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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6주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13 조회수1,382 추천수3 반대(0) 신고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개념과 서구권 사람들과의 인식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해피한 삶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사실 영어식 사고의 개념으로 행복이라는 개념의 어원은 바로 만족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만족시키는 정도에 있다는 개념입니다. 만족시키는 개념에서 행복을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어느 정도에서 만족을 해야 행복하느냐 행복하지 않느냐로 양분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설정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이런 인식의 기준도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일명 절대적인 행복과 상대적인 행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진정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행복한 거지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느끼는 척도나 감정으로 행복을 생각한다면 사실 조금은 이상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서울에서 한 지인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눈 대화가 생각납니다. 상당한 재력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주 가난하게 살아서 집안에서 간이 음식으로 우동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모친이 우동을 참 맛있게 끓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간혹 옛날 그 우동 맛이 그리워 우동 전문집을 찾아서 먹어도 그 시절 모친이 끓여주신 그 맛을 느끼기엔 역부족이라고 했습니다. 어느날 지방 재래시장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허름한 식당에서 우동 사리를 넣고 우동을 끓이는 분식점을 발견하고서 혹시나 옛날 어머니의 손맛이 나올 것 같아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우동 가격은 단돈 3000원이었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끓여주신 그 맛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같이 동행을 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 투덜거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 우동이나 먹으려고 비싼 기름들여 운전을 하며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곳에 아주 좋은 맛집이 있어서 고급 음식이 있었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우동집은 배제를 하고 그 맛집에서 식사를 하는 게 여행하면서 여행의 또 하나 재미라고 본다면 어느 정도는 만족을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가정이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모르긴 몰라도 물론 비싼 맛집 음식이 더 고급스럽겠지만 그 지인이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식탐의 만족도만 생각했을 때 맛집에서 먹은 고급 음식이 가져다주는, 먹는 행복감이 더 행복했을 건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령 그 가격이 30000원이라고 한다면 열 배의 가치만큼이나 더 행복한가입니다. 

 

제가 봤을 땐 오히려 3000원짜리 우동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열배 더 했으면 더 했지 들하지는 않했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돈의 가치로만 그걸 재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3000원짜리밖에 되지 않는 음식이지만 그 음식으로 옛날 가난한 시절의 그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만족감에서 오는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례에서 보더라도 행복도 어느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가난한 생활을 해서 돈을 절약해야 하기 때문에 우동으로 때울 수밖에 없어서 우동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했을 땐 그런 우동은 절대 그런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상황도 될지 모를 일입니다. 

 

같은 우동을 먹고도 느끼는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때로 행복을 타인의 삶과 비교를 해서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재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일종의 상대적인 박탈감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이와 반대로 생각하면 동일한 개념이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행복을 생각한다면 어떤 오류가 발생하는 것도 있습니다. 원래는 주변의 상황만 아니였다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서 그 격차에 대한 인식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결정하게 해 주는 단초가 된다면 조금은 우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오류라고 하긴 그렇지만 만약 그런 기준으로 행복을 바라본다면 그런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다 떠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행복지수는 높으면 좋겠지만 그 행복지수는 세상이 주는 행복감보다 먼저 자신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더 중요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인간 세상에서 흔히 보편적으로 말하는 행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복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에 나오는 말씀으로 본다면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4차원 같은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막말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 주님을 신뢰한다고 뭐가 나오냐 하는 것입니다. 이건 세속적인 기준에선 맞는 말이겠지만 신앙인이라고 해서 세속의 기준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신앙인은 세상보다는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게 신앙인의 본질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주시려는 행복은 이 세상에서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인간적인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잘 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걸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그걸 당연하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가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은 세상의 기준과 맞서 역행하는 생활이 신앙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화답송에 나오는 주님을 신뢰한다는 말씀도 이 세상에서도 통용되는 말씀이겠지만 실제는 그 말씀은 그 말씀을 그대로 신뢰하면 우리가 가는 하늘나라에서 그게 진정 행복의 길이 된다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만이 그 말씀을 신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로 힘들고 영적으로도 지쳐서 매너리즘에 빠져 영적 무력감을 체험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둠의 긴 터널을 언제쯤 벗어나게 될까 하고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단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기도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시련과 역경의 시간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는 시간이며 물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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