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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15 조회수1,238 추천수4 반대(0) 신고

 

우물에 가서 숭융 찾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원래 이 속담의 의미는 성미가 급한 사람을 비유해서 말할 때 인용할 수 있는 속담입니다. 원래의 의미가 가지는 의미보다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뉘앙스를 묵상하면 오늘 복음을 좀 더 잘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속담을 가지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숭융은 무엇인가요? 밥을 짓고난 후에 솥에 있는 밥을 이용해서 물을 붓고 끓인 게 숭융입니다. 우물에서 숭융을 마시려면 먼저 우울을 이용해서 밥을 지어야 할 게 먼저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숭융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우물에 있는 우물과 숭융은 전혀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물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갈증이 나서 물이 필요하다면 어느 물을 먹어도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느 물로써도 갈증을 해결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갈증이 났을 땐 숭융보다는 우물 물이 더 나을 것입니다. 가령 식후에 입가심으로 물을 먹는다면 이땐 차라리 숭융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배 안에 있는 하나의 빵만을 본 것입니다. 아마도 그 빵만으로는 먹을 식량으로서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 나머지 자기들에게는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봤을 땐 양이 부족한 것이지 빵이 없었던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양의 부족을 언급한 게 분명한 듯합니다. 같은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아직도 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이미 행하신 빵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목격을 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달리 생각해보면 허황된 욕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빵으로 다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빵을 더 많이 만드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일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서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융통성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완고함이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이전의 기적을 체험한 것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도 없지 않아 있으셨겠지만 무엇보다도 본질을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가장 클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빵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빵으로서의 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빵은 한 개밖에 남은 빵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빵이 아니였을 것입니다. 그 빵은 어쩌면 예수님 당신을 상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관복음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에 나오는 의미를 차용하면 그렇습니다. 우문현답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빵도 중요하지만 실제는 이것을 기회로 다른 것을 강조하신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당신의 본질을 빵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제자들이 좀 더 잘 알기를 바리셨던 것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생존에 급급한 빵에 의미를 두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빵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당신이 실제 빵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빵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생존을 위한 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 위한 빵입니다. 빵을 만들려면 그 속에는 누룩이 있어야 합니다. 그 누룩 중에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그게 상징하는 의미는 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 더 확장을 하면 하늘나라를 동경하는 영적인 삶에 치중하는 것보다 세상적인 삶에 더 치중하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현세에서의 살아가기 위한 빵도 물론 중요하지만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라고 하시는 촉구일 수도 있습니다. 

 

우물에 가서 숭융을 찾는 속담을 통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슈가성의 우물이 연상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했던 물은 단순한 목마름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로서의 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물과도 같은 그런 빵에 주목하라는 것이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물에 가서도 그저 단순히 숭융만 찾을 게 아니라 근원적인 숭융을 만들 수 있는 더 본질적인 우물을 마셔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우물이 바로 하느님께서 빵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처럼 그런 기적은 바로 이런 우물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숭융을 찾는 사람은 아닌지 묵상해보면 재미있는 묵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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