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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 연중 제6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16 조회수870 추천수2 반대(0) 신고

1독서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고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2,1-9
1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한다면,
4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7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8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9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차별문제

2,1-13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를 비교적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 야고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두둔하는데, 이는 1.27에서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라고 한 훈계와 상통한다.

 

1

신앙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율일한 판단기준이며 그분의 영광이 유일한 영광이다. 신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2-4절에서 필자는 대인논법을 사용하여 훈계한다. 이 논법의 어조로 미루어 야고보의 교회에서 가난하 이들을 실제로 그토록 차별했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4

서로마음속으로라고 번역하루 수도 있다.

사람을 차별하는 심판은 하느님의 심판과 정반대이므로 악한 심판이다.

 

5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두어 그들을 선택하신다. 야고보는 가난한 이을 경멸하고 부자를 두둔하는 처사의 그릇됨을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지적한다. 가나한 이들은 하느님이 당신 나라의 상속자로 택한 사람들이다. 부자들은 흔히 교회를 괴롭힌다. 야고보는 여기서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고 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가난한 이들의 부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부자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여 이미 이 지상에서 많은 영적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누구보다도 먼저 장차 올 하느님 나라의 부를 약속받았다. 이와같이 하느님은 모든 세속적 가치들을 전도시키신다.

 

6

모욕합니다의 그리스 원어는 과거시제이지만 그것은 2-3절의 실례를 생각해서 택한 시제이고, 야고보의 본뜻은 일반적인 경향을 경고하려는 데 있다. 당시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이 이미 어느 정도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6-7절의 내용을 보면 역시 부자들은 교회를 반대하고 박해하는 유다인과 이방인 부유층이다.

 

7

아무개 위에 어떤 이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들 그 어떤 이의 소유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위에 야훼의 이름이 불렸다는 것도 그런 뜻이다. 그리스도 신자들 위에 불린 이름은 예수의 이름이다. 세례 때 주례자는 영세자 위에 예수의 이름을 불러 예수의 소유로 선언한다. 그리스도 신자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주로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8

8-12절에서 야고보는 하느님의 계명이 차별을 금지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하느님의 계명대로 사랑해야 할 이웃은 무엇보다 먼져 가난한 사람이다. “왕도를 직역하면 왕다운 법또는 왕의 법이다. 8-12절의 문맥이 보여주는 바와같이 여기 이란 이웃사람의 계명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의 윤리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오로와 달리 야고보는 율법을 높이 평가하여 그것을 법 중의 왕자다운 법이라고 강조하며, 지키는 사람에게는 참다운 자유를 준다고 한다. 야고보의 인용문 중에는 의식법이 없고 윤리적 계명만이 나온다. 형식주의를 배척하고 예수의 율법해석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법의 중심은 사랑의 계명이다.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전승자 혹은 마르코는 예수의 정체에 관한 군중의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간의 대담을 만들었다. 이 두 가지는 본디 따로 전해온 독자적 전승요소였다. 군중의 여론은 6.14-15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두고 실제로 그런 여론들이 나돌았다. 베드로의 고백도 역사적 신빙성이 있을까? 실지로 베드로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근처에서 예수의 신분을 밝혀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했다는 설이 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 공생활 때의 사실보도이기보다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인상이 짙다. 사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건들을 특히 십자가의 부활 사건을 선포하고 믿기도 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정체를 밝혀 예수께서 주님이시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다라고 환성을 질렀던 것이다. 베드로의 답변은 바로 이 환성의 변형이다. 환성이야말로 가장 깊이있는 신앙고백이다.

 

27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 동기인 헤로데 필립보가 헤르몬 산 아래 지하수가 펑펑 솟아나는 자리에다 기원전 2년경에 세운 도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백리쯤 되는 곳. 지금은 바니아스라 한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자주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다니셨으나 이제부터는 가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을 가신다.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처형된만큼 거기로 가시는 것은 죽음에의 행진이다.

 

30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나 영화를 누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실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있기 전에는 당신 정체를 알리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리신다.

 

31

가르치기 시작하다는 전형적인 마르코 문제다. 이 복음서에 가르치다17“... 하기 시작하다26번쯤 나온다.

 

고난당하는 인자

 

마땅히 ... 해야 한다에는 하늼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원로들은 유지들을, 대제관들은 종전 제관들을 , 율사들은 주로 바리사이계 율법 전문가들을 뜻한다. 이들이 모여 최고의회를 구성했는데 실지로 예수 수간의 주역들이었다. 수난의 주역 열거는 사후예언이다.

 

사흘 후에”, “사흘 만에는 같은 뜻이다. 31절에서 죽음과 부활 사이를 3일로 잡은 것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선포문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제 선포문에서 그렇게 부활됨을 명시한 이유에 관해 세 가지 설이 있다.

 

1) 부인들이 무덤에 예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발견한 때가 일요일, 곧 돌아가신 지 삼일 만이었다고 보는 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이다. 2) 예수께서 처음으로 발현하신 때가 돌아기신 지 사흘만이었다고 보는 설: 부인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언급,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에 나오는 발현 날짜를 너무 순진하게 믿는 설이다. 3) 의인들이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사흘 만에 부홀하셨다는 신조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이는 꼭 사흘을 뜻하는 게 아니라 가까운 시일을 의미한다는 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부활임을 명시할 때 언제나 사흘 후에또는 사흘 만에라고 하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납득이 가지 않는 설이다.

 

32

명백히는 공관복음 전부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는 낱말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받으실 것을 명백히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했으나 수난하는 그리스도이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승을 나무란 것이다.

 

33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가면 스승은 앞서가고 제자는 디따라갔다. 그러므로 내 뒤로 물러가라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제자의 위치로 돌아가 스승을 따를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사탄은 귀신들의 두목. 베드로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예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려는 것을 만류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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