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 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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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17 | 조회수1,26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2,14-24.26 주해 믿음과 선행 신앙의 실천이 야고보의 가장 큰 관심사다. 그는 이미 신앙과 실천에 관해 언급했다. 이제 14-26절에서는 신앙과 실천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야고보의 입장은 바오로의 입장과 분명히 다르다. 바오로는 인간이 신앙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는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동은 바오로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에서 비판한 “율법의 행업”이 아니라, 바오로가 신앙과 성령의 “열매”라고 한 덕행이다. 그 행동은 특히 이웃사랑과 기도다. 이와같이 행동을 강조하는 것은 마태오복음에 반영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과 비슷하다. 바오로는 율법의 행업으로 구원된다는 보수적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구원론을 반대하여 신앙으로 구원된다는 절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 결과 그는 신앙과 행동을 엄격히 구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고보가 직면한 현실은 아주 달랐다. 그는 바오로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왜곡하여 행동의 가치를 무시한 사람들을 바로잡기 위해 신앙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게 되었다. 15절 15-16절은 훈계가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설명하는 비유다. 18절 18-19절의 뜻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해석자들의 의견이 각각 달라서, 디벨리우스는 18절을 신약성서의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문제는 “어떤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문학유형상으로만 본다면 필자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지만, 내용상 18절의 경우에는 야고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다. 이 “옹호자”의 말은 23절까지 계속된다. 18절에서 23절까지는 상대가 “너”이고 24절부터는 상대가 다시 “여러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19절 야고보가 반대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의 분리다. 여기서 반대편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교에서 인정할 수 없는 순전히 관념적인 믿음이다. 유일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귀신들의 믿음은 신학적으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사이비 신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21절 바오로처럼 야고보는 자기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본보기로 끌어댄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같은 아브라함을 두고 바오로와 반대의 결론을 내린 점이다. 야고보는 유다교의 고전적 인물인 아브라함을 “아버지”그리고 “하느님의 친구”라는 전통적 명칭으로 부른다. 야고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이사악 제헌은 그의 신앙을 보여주는 실천이었다. 그는 창세 15.6과 22장을 결부시킨다. 반면에 바오로는 창세 15.6에 의거하여 아브라함의 신앙이 할례나 율법 따위의 행업을 앞서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야고보의 주장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침으로써 자기 신앙을 행동으로 입증하여 의롭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핵석은 유다교 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다. 22절은 믿음과 행함의 일치와 그 상호보완성을 분명히 밝히는 명언이다. 24절 24절은 바오로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오로 사도는 할례, 안식일. 금식 같은 유다교 율법의 특수한 행동을 비판했지, 실천없는 믿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믿음만으로”라는 표현을 보면 앞의 “행함”에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조리있게 밝힌 야고보의 말을 참작하면 바오로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주해 어떻게 예수를 따라야 하는가? 본디 상관이 없는 네 단절어가 초창기 신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일찍이 어느 전승자가 넷을 한데 모아 집성문을 엮었는데, 마르코는 그것을 채집하여 이 자리에 배치했다. 모름지기 제자들은 수난하고 죽으신 스승(31절)을 따르고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34절 추종어의 변체가 어록에도 전해온다. 추종에 요구되는 두 조건은 자아 부정과 십자가 수락이다. 자아 부정은 무조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추종에 무조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명하신 것은 장자가 “자아를 잃었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그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일을 상기하여 전승자가 가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 “그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일 수도 있고 추종자의 십자가일 수도 있겠다 35절 이 단절어의 변체가 어록과 요한 12.25에도 있다. 35절의 경우 전.후반부가 병행문인데, “나와 복음 때문에”를 삭제한다면 더욱 완벽한 병행문이 된다. 전승자가 “나 때문에”를 덧붙인 데 이어 또한 마르코가 그 사이에 “복음”을 덧붙인 데 이어 또한 마르코가 그 사이에 “복음”을 덧붙인 이어 또한 마르코가 그 사이에 “복음”을 덧붙인 결과 “나와 복음 때문에”라는 표현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가필을 제외한 병행문을 살펴보자. 얼핏 보면 군 지휘관의 훈시를 연상케 한다. 전선으로 출동한 병사들을 앞에 놓고 “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살 생각을 하면 죽는다”따위 훈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 지휘관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 선포자였다. 따라서 단절어의 뜻인즉 이렇다.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보전하려고 작심하는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영생을 잃을 것이요, 현재 일시적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영생을 차지할 것이다. 그럼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 생애 말기쯤 종교계 지도자들이 당신을 처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지자 스승은 제자들을 상대로 이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으리라. 36절 36-37절 단절어에는 상업용어가 많이 나온다: 벌어들이다. 손해.이득.대가.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 목숨은 잃어버리는 미련한 것을 격노하신 토막 말씀인데 이와 비슷한 내용의 단절어가 루카 `12.15에도 전해온다: “여러분은 온갖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시오. 사실 제아무리 부오하다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소유도 자기 생명을 보상받지는 못합니다.” 또한 어리것은 부자 예화로써 같은 내용을 생생하게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아람어로 재물을 마몬이라 하는데, 그 어원을 풀이하면 “실하다. 믿음직스럽다”이지만 실상 마몬은 “부실하다. 믿을 바 못 된다”고도 하셨다. 그러므로 마몬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해야만 지금의 삶도 영생도 보장받는다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여러 단절어와 예화를 말씀하셨다. 38절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대로 장차 종말에 예수께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대하시겠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이다. 그 변체가 어록에도 전해오는데 루카의 구절이 가장 오래된 전승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에 관해 고백하면 인자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에 관해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할 것입니다.” 그럼 누가 왜 이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을 발설했을까? 초창기 신도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 “예수는 주님이시다”또는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고 “환성을 질렀다”그런데 “나에 관해 고백하다”는 바로 이런 부류의 환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역기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은 예수님 말씀이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창작한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왜 이런 보상률을 창작했을까? 박해 받는 가운데서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도록 신도들을 격려하려고 그렇게 했다. “부끄럽게 여기면”은 8.35; 10.29 참조. “사람의 아들”은 종말심판관. “아버지”는 하느님.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하다. 9.1절 마르코는 독립 전승들을 연결할 때 상투적으로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라는 연결문을 쓴다. 따라서 9.1은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온 단절어다. “진실로”는 원문에는 아멘. “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힘차게 오는 것”은 역사 종말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을 뜻한다. 예수 청중 가운데 일부는 살아서 종말을 체험하리라는 종말시한어는 틀림없이 종말이 임박하다는 분위기아래서 발설되었다. 내용상 비슷한 시한어가 13.30과 마태 10.23; 29.30에도 있다. 예수 친히 이런 시한어를 발설하셨을까? 아니면 예수 부활 후 초대교회에서 만들었을까? 어쨌든 예수님의 청중이 살아 있는 동안 종말이 도래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마르코는 70년경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이 사실 때문에 곤혹을 느꼈다. 그래서 시한어의 변모사화를 연결하여, 예수님의 청중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은 스승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았으니 “하느님의 나라가 힘차게 오는 것”을 본 거나 진배없다고 풀이했다. 억지 해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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