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십자가는 짐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18 조회수1,158 추천수1 반대(0) 신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대화를 할 때 특히나 고민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당연히 신앙생활을 할 때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대부분 이 말을 하면서 빼먹는 게 있습니다. 복음이나 강론 때 듣는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대화 중에 언급을 단 한 번도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질 때 그 전제조건으로 자기부인을 언급하셨는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자기부인이 전제되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씀과 같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자기부인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십자가는 마치 소의 코에 다는 코두레와 같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소코두레를 소에게 달아주는 이유는 원래는 힘이 센 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코두레를 당기면 소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그 고통으로 인해 제어가 되기 때문에 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는 본능적으로 자기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마음에는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또는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좋게 발현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후자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도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것도 다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보면 주종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예속관계입니다. 종속과 예속은 조금 다릅니다. 다 같은 의미이지만 상대적으로 종속은 힘의 논리가 적용되지만 예속은 힘의 논리로 본다면 수평관계입니다. 다만 그게 수평이지만 구속력은 있습니다. 마치 직장에서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직급상은 수직관계이지만 한 인간대 인간으로서는 동일한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바라볼 때는 수평관계가 되어야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만약 우리를 로봇처럼 창조를 하셨다면 우리는 비참한 존재가 될지 모를 일입니다. 예속도 매인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이건 강제가 아니고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거부도 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에 스스로 순응하는 것입니다. 사실 겉모습은 매인 것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예속관계라고 해도 그 속에는 한계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은 소에게 어떤 고통을 가해서 그 힘으로 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코두레를 하지만 하느님께서도 단순히 그런 수단으로 십자가라는 것을 인간에게 허용하셨을 거라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십자가가 하나의 고통과도 같고 짐과도 같은 존재로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짐과 고통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가 코두레로 제어되듯이 인간의 자아를 통제해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등산을 할 때 우리는 배냥을 메고 갑니다. 마치 베낭과도 같을 겁니다. 베낭은 무게가 있어서 버거울 수도 있지만 베낭은 단순히 짐을 넣기 위한 가방인 도구가 아니라 비상시에 사고가 일어날 때 허리의 부상을 예방하는 수단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원래 누구나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거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데 그마저도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남용하며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자기부인이 될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모순과도 같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애시당초 왜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고 그냥 하느님께 무조건 순종하는 피조물을 창조하셨더라면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로봇을 만들어 단순히 로봇을 조종하는 존재이시라면 그런 하느님의 존재가 얼마나 우스운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인 몸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우스운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매일이라는 말씀이 생략됐지만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는 십자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겠지만 그걸 피하면 또 다른 십자가가 오는 것을 짧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이 하느님께로 잘 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형구로 생각한다면 그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무거운 십자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걸 그렇게 인식하고 가도록 노력을 한다면 지금은 이 십자가를 잘 이해를 할 수도 없겠지만 언젠가 우리는 그 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걸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저도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날이 오기를 희망만 할 뿐입니다. 

 

지금은 그걸 깨닫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은 확신합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만의 십자가가 다 있을 건데 그건 하느님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을 하면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무엇 때문에 신앙의 길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