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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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20 | 조회수1,01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러분이 마음속에 이기심을 품고 있거든, 자만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3,13-18 주해 진정한 지혜 3.13-4.12에는 주로 상호간의 화목에 관한 훈시의 단절어들을 모아 놓았다. 그는 3.13-17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다투지 않는다고 한다.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다툰다면 그의 지혜는 온순한 천상 지혜가 아닌 악덕의 지혜다. 이 부분이 3.1-12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3.1에서 교사들을 두고 말했듯이 여기서도 주로 교사들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참 지혜다. 그들이 지혜롭고 화목하지 않으면 공동체에 파쟁이 생기는 것이다. 13절 지혜로움을 자치하는 것은 부질없다. 지혜는 무엇보다 온유한 처신으로 드러나야 한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지혜는 신앙과 마찬가지로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 14절 “야망:대신 “이기심”,“경쟁심”또는 “편파심”으로 번역할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한 경우에 파멸이 생겼다. 바오로가 세운 코린토 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다(1코린 1.10.4.21). 질투와 야망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해도 그것은 헛된 사랑이요 진리를 어둡게 만들 뿐이다. 15절 “동물적”은 “영적”의 반대어로서 “심리적” 또는 “자연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 표현은 유다 19절(“속물”)과 1코린 2.14; 15.44-46에도 나온다. 동물적 또는 자연적 인간은 영적 세계에 대한 참된 맛을 모르고 현세와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17절 17절은 마태 5,3-10의 행복선언을 상기시킨다. 순결과 행위는 마태 5,8-9에서도 같은 순서로 나온다. 18절 “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함이다. “의의 열매”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가끔 나오는 표현으로서 “의” 자체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남과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므로, 그것이 좋은 씨앗이 되어 언젠가는 그를 하느님의 상급을 받을 완전한 의인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온순하고 평화로운 사람만이 의를 행한다는 말은 1.20의 내용과 같다.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사람들에 의하여”라고 번역하는 주석자들도 있다. 복음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29 주해 간질병자 소년을 고치시다 9.14-29는 치유이적사화 서술양식을 따라 상황묘사(14-24절), 기적적 치유(25-27ㄱ절), 치유 실증(27ㄴ절),순으로 엮여 있다. 다른 치유이적사화에 비해 특이한 요소도 더러 있다. 상황을 장황하게 묘사할뿐더러, 제자들의 무능을 서술한다. 치유이적사화 끝에는 으레 목격자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 대신 제자교육이 적혀 있다. 여기 치유이적사화에도 본디 목격자들의 반응이 수록되어 있었을 터이지만 전승자나 마르코가 그것을 제자교육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소년은 간질을 앓았은데 발작하면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리고 불이나 물을 보면 발작하는 수가 많았다(22절). 당대 사람들은 귀신이 붙어서 간질 따위 고약한 병이 난다고 여긴지라 이 치유이적사화는 구마이적사화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7절 17-18절에서는 제자들의 무능을 폭로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승자와 마르코가 조작했다고 볼 수밖에 없겠는데, 제자들을 존경한 그들이 사실무근한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23절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그리고 믿음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므로 그분의 전능에 참여한다. 사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수가 많다. 28절 28-29절은 전승자나 마르코가 목격자들의 반응을 없애고 그 대신 제자교육을 덧붙인 것이다. 여기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을 전하는데, 사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줄 때 곧잘 병이 낫는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해서 당황하는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 기도를 권장했다. 사실 초대교회에는 기도로 병을 고쳐주는 사례가 있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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