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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3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22 조회수1,263 추천수2 반대(0) 신고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폴리카르포는 요한 사도의 제자로, 스미르나 곧 오늘날 터키 이즈마르 지역의 주교였다. 그는 특히 정통 교리의 열렬한 수호자로 여러 이단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이교적 교리에 심취하였던 아우첼리우스 황제에게 체포되어 166년 순교하였다. 성 폴리카르포 주교는 사도 시대와 이후의 교회를 연결하는 위대한 기록자이자, 2세기 그리스도교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기념일 제1독서(묵시 2,8-11)

스미르나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8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

9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10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이제 악마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너희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겠다.

11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8

스미르나는 에페소 북쪽 120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로서 아시아의 매력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소아시아 도시다. 루치아누스는 이오니아의 도시 중 가장 아름답다고 했으며, 옛 시인들은 아나톨리아의 보석, 소아시아의 왕관이며 꽃이라 예찬했다. 2세기에는 로마의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다. 특히 이곳 유다인들이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했는지는 이 도시의 주교인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1.8의 그리스도 호칭을 되새긴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를 통해 입증된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겪고 나서 새 생명을 얻으신 분이기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조건과 하느님의 영원성을 일신에 모아 놓으신다. “시작이요 마침”, “알파와 오메가등 그리스도 호칭은 이러한 총체성을 표명한다.

 

9

환난이란 대부분 그리스도인을 예수의 고통에 동참케 하는 박해와 동의어다. 여기서는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궁핍의 원인이며 결과다. 성서적 언어로 가난한 자는 억압받는 자다. 힘센 자의 희생물로서 환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미르나 교회는 마태 5.3의 첫째 행복을 실제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미르나 유다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들은 이름만 유다인으로서 복음의 메시지를 배척하고 복음의 전파를 방해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겉모양만 갖추었다고 유다인이 아니라, 유다인의 속마음을 가져야 진정한 유다인이며또한 법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 교회를 박해하는 유다인들은 이제 하느님의 회중”(민수16.3)이 아니라 사탄의 회중이다.

 

10

악마가 스미르나 교회 신자들에게 가하는 유혹은 그리길지 않을 것이다. 10은 숫자의 상징에서 충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열흘은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진 시험 기간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요한의 상징성에서 이 말은 한정된 시간을 말한다.

 

환난을 겪으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하느님을 증언한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생명의 월계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 월계관은 승리기쁨이라는 두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동시에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성서의 여러 곳에서 월계관에 대해 말한다. 결국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11

유다 사상이나 초대교회 사상에서는 사람이 일단 첫째 죽음후 어떤 대가도 같은 곳에 들어가서 마지막 심판날까지 기다리는 중간상태가 있다고 믿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두 가지 죽음이 있으며, 그 하나는 누구나 맞보아야 할 육신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하느님께 불충했던 죄인들이 최후심판 후에 맛보게 될 영혼의 죽음이라 하겠다. 목시록 후편에 따르면 유황이 타오르는 불못에 빠져죽는 것이 둘째 죽음이다. 요컨대 둘째 죽음은 영원한 지옥벌을 받는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승리한 자에게는 둘째 죽음이 오지 않는다.

 

 

 

 

 

 

 

기념일 복음(요한 15,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의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증오

이 대목은 제자들이 예수 때문에 겪게 될 세상의 증오가 주류다. 제자들이 예수 안에 머물면서 예수의 모범대로 사랑을 나누면서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 앞의 대목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룬다. 사랑의 공동체가 증오의 세상에 직면된 이 대조가 이 대목을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하나의 문맥 가운데 서로 다른 양상이 서술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담화로만 엮어진 이 대목도 앞의 대목과 함께 예수의 고별담화로 여겨진다. 물론 예수의 고별 상황을 시사하는 구절들도 이를 잘 반증한다.

 

18

제자들은 예수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한다. 원문의 표현도 제자들이 이미 세상의 증오를 실제로 체험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미리 말해줌으로써 위로하고 격려하여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또한 증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또한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예수는 그들보다 앞서 이미 세상의 증오를 받았다. 제자들을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세상은 하느님이 파견하신 자를 배척하여 하느님을 등진 인간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세상도 하느님 사랑의 대상으로서 구원 가능성은 있다. 모든 증오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바로 그런 세상에 예수를 증언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개념이 양면성을 지닌다. 한번 완고한 불신과 증오로 가득 찬 인간세계다. 따라서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면서도 구원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제자들의 복음선포 상황은 증오와 박해의 상황인 동시에 신뢰와 믿음의 상황이다. 이 구절에서는 다만 부정적 체험 선상에서 예수의 말이 언급되고, 제자들이 세상의 그런 상황을 보도록 일깨우며 격려한다.

 

19

세상이 제자들을 증오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세상은 하느님을 등진 인간세계로서 제자들마저 적대시하는 세상으로 언급된다. , 제자들과 분리되고 대립된 세상을 가리킨다.

 

20

예수의 역사적 사건까지도 상기시키는 뜻을 담고 있다.

 

제자들이 상기해야 할 예수의 이 말은 아마도 박해받던 당시 요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제자들 복음선포 결과의 두 가능성. 곧 거절과 박해 신뢰와 믿음이 언급된 이 말은 지속적 선포활동을 당부하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예수의 활동이 헛되지 않듯이 제자들의 증언활동 역시 헛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21

현 문맥상 증오와 박해를 가리킨다. 16, 1-2에서 더욱 명료하게 언급된다.

마르 13.13\\ 참조. 여기서는 종말론적 상황보다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시사하고, 제자들에 대한 증오와 박해는 예수에 대한 증오와 박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뜻한다.

 

제자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는 자들이 예수를 파견하신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을 거절하고 등진 자들이라는 것을 뜻한다. , 믿지 않는 유다인들을 가리킨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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