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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주교 신자가 가는 천국, 개신교 신자가 가는 천국은 다른 곳인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23 조회수1,404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가 예전부터 의문과 함께 항상 묵상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개신교 신자들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도 천국을 동경하고 그곳도 천국을 동경하는데 그럼 두 종교가 지향하는 천국은 말은 같은 곳인데 서로 각각의 천국이 따로 존재하는가 입니다. 정답은 무엇일까요? 이성적인 논리로 본다면 하느님은 두 분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하는 사도신경도 그들이 고백하기로 하느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젠 개신교 사도신경은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처음엔 아주 헷갈렸습니다. 전체 내용은 같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아우르는 종교입니다. 혈통으로 보면 천주교가 인간세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큰집과도 같은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로 말할 것 같으면 큰아들입니다. 작은 아들이 마치 개신교와 같습니다. 물론 복음에서는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가지고 나갔지만 어쨋든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개신교를 부를 때 갈라진 형제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건 교회의 교도권에서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잠재의식에는 구원의 절대적인 진리는 천주교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배경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해와 사실은 사실 본질적으로는 다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미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구원은 천주교 신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도 열려 있다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은 표현을 달리 했을 뿐이지 실제는 이렇게 표현을 해도 될 것입니다. 천국은 천주교 신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얼마든지 개신교 신자들도 천국의 문호가 개방돼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그렇지만 개신교 입장에서 우리가 이런 노선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우리와 다른 입장을 표명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만이 생각하는 천국은 그들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한 사실과 상관없이 그들도 사실 복음을 보지만 복음의 진정한 면을 보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근거로는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반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는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감히 우리 인간들이 어찌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인간이 논한다는 것도 어쩌면 불경스런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학적인 학문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하느님을 더 잘 알고자 하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 위한 학문이 될 것입니다. 저야 신학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솔직히 이건 신학을 굳이 차용하지 않아도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을 보게 되면 결정적인 구원의 조건과 천국에 가는 길은 바로 얼마나 이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내용이 확장되어 하나의 교도권의 범위 내에서 교회가 신학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정립한 이론이 그 유명한 칼 라너 신부님의 '익명의 그리스도' 이론일 것입니다. 

 

단순히 표현해서 이 이론은 자기 탓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구원의 자격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해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럼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되야 하는지 모른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지만 광의적으로 해석했을 때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 사람 본연의 내적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면 그런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은 열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런데 우리와는 조금 다른 믿음의 시스템을 가진 개신교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우리는 하느님 그들은 하나님이라고 하느님을 다르게 호칭한다는 것은 별론으로 한다고 해도 예수님은 같은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느님을 다르게 부르지만 성자 하느님은 같은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아주 세부적인 틀은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우리와 동일한 개념으로 그들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장황한 설명을 배경으로 깔았습니다. 

 

우리는 서두에 언급했듯이 무의식 속에 천주교 신자만이 천국에 간다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개신교 신자보다는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복음과 연관지어서 묵상을 하면 답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 39절을 한번 잘 보시기 바랍니다. "막지 마라. 네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을 한번 잘 묵상해보면 개신교 신자들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그들도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그들과 약간의 교리는 차이가 상이한 부분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같은 성자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바라볼 때 오늘 복음 말씀처럼 사실 우리 천주교를 지지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볼 때 우리의 구원관 밖에 그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해야만 할까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들은 우리가 가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 방심에 빠질 우려가 다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심에 빠졌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큰코 다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모를 일입니다.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겠습니다. 설령 하느님께서 백번 양보하셔서 우리가 만약 세상적인 표현으로 혈통으로 본다면 적통이라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혈통이 적통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혈통만 적통이면 뭘하겠습니다까? 혈통은 적통은 아니지만 실제 예수님의 가르침인 복음의 삶을 만약 그들이 더 잘 지키고 실행을 한다면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열려 있다고 하나 천주교, 개신교라는 종교를 떠나서 구원의 최종적인 운명은 내 자신이 천주교라는 적통에 소속된 사실이 더 중요한 게 아니고 누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면 우리는 바짝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구원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적통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우리에게는 그냥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 그냥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최소한 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진지하게 다른 각도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실 복음 행간에는 제가 오늘 말씀드린 것이 녹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복음이지만 개신교 복음에는 천국은 침노해서 들어가야 한다고 번역을 했고 우리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한다고 번역을 달리 표현했지만 개신교의 번역을 잠시 인용해서 생각한다면 천국은 그냥 그저 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침노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냥 쉽게 갈 수가 있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천국으로 가는 길이 좁은 길이라고 왜 예수님께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결론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개신교에 대해 자존감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지나친 우월감을 가지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는 그 사람이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가 요건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천국은 그냥 따놓은 당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만약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개신교 신자가 하느님의 가르침과 복음대로 더 잘 산다면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이 마지막 때 누구에게 더 가게 될지 묵상해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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