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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23 조회수1,004 추천수3 반대(0) 신고

 

 

 

2022년 02월 23일 수요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현대인들은 대개 바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정해진 시간표대로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데 익숙합니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는 표현을 습관처럼 사용하는 사회에서

정해진 시간을 잘 쪼개어 쓸 줄 아는 사람은 칭송을 받지만,

시간을 허투루 보내거나 낭비하는 사람은 한심한 취급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죽음으로 한정된 시간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시간이 주로 무엇을 얻으려는 데 소비되는지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현세에서 가지고 싶거나되고 싶거나,

누리고 싶은 것을 얻고자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주님의 선물임을 일깨워 줍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현세의 시간을 언제까지 허락하실지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귀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물론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고각자 종사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현세의 가치만 좇으면서 주님께 받은 한정된 시간을 모두 써 버린다면,

오히려 그것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약속된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

곧 기도와 말씀 읽기이웃 사랑 실천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내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은,

현세에서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며

더 좋은 일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9,38-40)   


 "막지 마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 자신의 모습과 공동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얼마나 복음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요한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잘했다고 칭찬듣기 위해서 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잘못된 요한의 행동을 꾸짖으셨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요한의 행동의 기준은 어떤 사람이 옳은 일을 하였는지 착한 일을 하였는지 또는 예수님의 일을 하였느냐가 아니고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냐 아니냐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그 판단의 기준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면 우리편이라면 나쁜 일을 하더라도 괜찮고 다른 사람은 좋은 일을 한다하더라도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는 논리는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인가?

개인적인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자신을 망치고 사회를 망친다. 

우리 사회를 보라.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안 되는가, 우리편인가 아닌가? 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조는 대부분 지방색, 학교의 선후배 관계, 당리당략에 좌우되는 일이 많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이고 선인지가 중요하지가 않은 사회가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고, 우리 편이면 눈 감아 주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신앙인이면 무엇하는가?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일반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 
신앙인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은 항상 복음적이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또는 상대방이 하는 일이 복음적인가 아닌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굳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익이 아니라 또 자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에 따라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자신이 복음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즉 우리의 이익과 편가르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보고 그를 막은 이유가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 일을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
개인적인 죄의 근원이 하느님의 자리에 자기(나)를 놓았다면 요한의 잘못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하는데 요한은 그 자리에 "저희"를 갖다 놓은 것이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곳이다. 인간이 인간을 따른다는 것은 불행을 재촉하는 것이다. 예수가 아니라 "우리"를 따르게 할 때 또 다른 분열이 일어나는 법이다.

본당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되고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안되고 하는 서로 편을 가르는 일은 없는가?  본당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끼리끼리만 모인다면  그리고 자기들이 하는 일만을 인정한다면 끊임없이 남을 나쁜 쪽으로 판단해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적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들만의 울타리 속으로 갇히는 것이다. 우리는 갇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교류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로 개방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막지 마라."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교회는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항상 보편적이고 모든 세계를 향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개인주의를 깨닫지 못하면 선한 일도 이기주의의 명목으로 한다.
요한의 자세에서 우리가 반성해야할 또 다른 것은 특권의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악령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던 것과 같이 좋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다. 그 이유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외에 자기들만의 특권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 쫓아내는 일은 제자들인 자기들에게만 주신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즉 자기들의 특권인줄로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마귀를 쫓아내고 있으니 기분 나쁜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특권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자기들은 마귀를 쫓아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내용은 예수 시대가 아니라 사도들의 시대에 쟁점으로 떠오른 문제였다. 사도단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할 때, 특히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일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는 실로 미묘한 문제였다.
초대 교회에서 이러한 사건은 흔히 벌어졌으며 다양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마르코가 전하는 답변은 분명하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는 안 되고 배타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요한처럼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반대하는 자세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 제자의 본분을 잃어버린 자세이다.

다시금 어제 복음에서 묵상했던  "받아들임"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 가를 생각하게 한다. 즉 넓은 마음으로 좀더 대범하게 교회 울타리밖의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특권의식을 버려야 한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 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가르는 식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와 함께 다니고 안 다니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도와주는 일이다. 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은 순전히 집단 이기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다.
우리도 이런 특권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막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선은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록 우리의 것이 아니더라도.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즉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다(? 정말). 계속해서 타종교와도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가야하고 다른 사상과도 대화의 장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지금 우리 가톨릭의 문제는 나는 되고 너희들은 안된다는 것이 사실 이다- 온통 세상이야기로 도배를 하면서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란 옹졸한 사람이 아니다.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나의 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비록 생각이 다를지라도 또 가톨릭 신자가 아닐지라도 그를 포용하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려면 우선 나의 생각부터 개방된 사고 방식이어야지 자기 생각으로 갇혀있는 옹졸함을 갖고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알을 깨고 새가 나오듯이 우리의 좁은 낡은 사고를 깨어버려야지만이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좀 더 큰 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좀 더 개방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 그것이 곧 "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 "이다. 
그것이 머리로만 하던 신앙 생활에서 몸과 마음으로 하는 참다운 신앙생활로 옮겨지는 과정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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