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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4 연중 제7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23 조회수1,311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일꾼들에게서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 아우성이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5,1-6
1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2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3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4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1.10-11;2,2-7에 이어서 여기에 세 번째로 부자를 훈계하는 말이 나온다. 그렇지만 1.10;2,2-4의 부자들은 교회 내 신자들이고 5,1-6의 부자들은 우선 외부 사람들이다. 야고보는 예언자처럼 그들의 태도와 횡포를 고발한다. 이것은 동시에 신자들 가운데의 부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자들에 대한 이런 입장은 가난한 이들을 옹호한 예언자와 또한 가난한 자로 자처한 시편작가의 영성을 이어받은 것이다. 예수도 가난한 이들의 행복을 선언하고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복음선포의 대상으로 삼은 반면, 부자들에게는 준엄하게 경고했다. 야고보가 예수보다 더 신랄하게 부자들을 고발하는 이유는 당신 교회가 부유층과 권력등에게 억압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2

2-3ㄱ절 동사들의 과거시제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예언자들은 흔히 장래에 있을 심판의 위협을 이미 이루어진 것같이 표현했다. 야고보가 이러 의미로 썼다면 그는 종말의 파국을 생각해서 그 때에 닥칠 불행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한편 부자들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자꾸 쌓아 두기만 하기 때문에 그것이 흔히 썩거나 좀이 먹곤했다. 바로 이 사실이 그들의 무자비를 입증하는 고발이다. 금과 은이 녹슨다거나 녹이 불처럼 된다는 말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야고보는 설교에 열중한 남어지 전통적인 표현들을 마구 나열한다.

 

3

마지막 시대마지막 날들의 의역이다. 예수의 오심으로 종말이 가까워졌다. 이제 재물을 쌓는 일은 심판이 가까운 이 시대의 성격을 전혀 모르는 헛된 것이다.

 

4

만군의 주님이란 표현은 구약성서에 자주 나오고 신약성서에서는 여기와 로마 9.29에만 나온다. 원래는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시는 하느님을, 그 다음에는 천상 군대인 별들과 천사들을 거느리시는 하느님을 가리킨다. 4절은 구약 율법과 예언자들의 요구를 이어받은 것이다.

 

5

도살의 날은 부자들이 의인들을 착취하고 학살하는 행위를 상기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최후심판의 날, 곧 하느님에 의해 악인들이 도살되는 날일 것이다. 이 종말론적 핵석은 3절의 마지막 시대와 잘 어울린다. 부자들은 세속의 쾌락에 빠져 임박한 심판의 날을 잊고 있는 것이다.

 

6

6절의 의인은 예수를 가리킬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가난한 이를 뜻할 것 같다. 사실 구약성서에서는 가난한 의인의 고난을 여기서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서에서는 억눌린 자가 자주 복수심을 드러내지만 야고보가 생각하는 가난한 이는 하느님의 심판을 믿고 대항하지 않는다.

 

 

 

 

 

 

 

 

 

복음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1-5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41

41절은 많이 변질되었는데 다행히 마태 10.42에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제자라는 명분으로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사람은 ,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제 보수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 단절어의 뜻은 자명하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비록 인간적으로 볼 때 못난이들이지만 고귀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제자들)이므로, 그들에게 조그마한 선심(냉수 한 잔)을 베풀어도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죄를 단호하게 물리쳐라

이 대목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를 이간하지 말라는 경고(42), 그리고 죄를 단호하게 물리치라는 상징어로 구분된다.

 

42

작은 이들은 제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열두 부족을 모으실 뜻을 품으셨다. 그리하여 상징적으로 열두 제자를 뽑아 데리고 다니며 교육하시고 또한 파견하셨다. 42절의 단절어는 예수님이 그토록 아끼시는 제자들을 당신과 이간시키려는 적수에게 경고하신 말씀이다.

 

43

43-48절은 죄를 지으면 지옥으로 가고 죄를 끊으면 생명으로”(43.45), 하느님 나라로”(47)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작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서술하여 손과 발과 눈이 작죄하도록 충동질하거든 가차없이 찍어 버리고 빼어 던지라고 하신다. 실제로 지체를 절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듯 단호하게 작죄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이다. 이 상징어의 변체가 마태 5,29-30에 나온다.

 

지옥은 원문의 게엔나를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게엔나는 본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벤힌놈 골짜기의 그리스어 음역이다. 기원전 622년 유다 왕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까지 벤힌놈 골짜기에서 몰렉 신에게 어린이들을 불살라 바쳤다. 따라서 벤힌놈 골짜기는 고약한 곳으로 평이 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는 종말에 죄인들이 갈 곳을 그렇게 불렀다.

 

(44)45

알렉산드리아. 베자 사본등에서는 48절을 44.46절에 한번씩 반복하는데 44,46절은 복음서 집필 후의 가필이다.

 

48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이사 66.24에서 따온 것이다.

 

소금의 상징어

49-50절에는 소금에 관한 말씀이 세 가지로 나오는데, 49.50ㄱ절은 연쇄어 집성문에 들어 있던 상징적 단절어들이고, 50ㄴ절은 마르코의 가필이다.

 

49

49절의 상징적 단절어는 너무 간략해서 상징의 뜻을 밝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억지로 해설한다면 불이라는 상징과 소금절이라는 상징의 공통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소금절이는 부패를 막고 불은 불순물을 태워버린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면, 종말의 행복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뜻일까?

 

50

50ㄱ절의 변체가 어록에도 전해온다. 세 가지 형태 가운데 루카 14,34-35가 가장 오래된 것이므로 그를 옮기고 해설하겠다. “소금은 좋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싱겁게 된다면 무엇으로 그것이 제맛 나게 되겠습니까? 땅에도 거름으로도 제구실을 못하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인데, 무슨 일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와 비슷한 구조를 지닌 말씀들을 참고하건데 추종을 가리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추종은 좋은 일, 그러나 추종이 추종답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김천택의 시조를 연상시킨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

누가 가장 높은지 서로 다툰 제자들을 향하여 이제 마르코는 서로 평화롭게 지내시오라고 충고한다. 그 병행문 여러분 안에 소금을 간직하시오역시 같은 뜻을 수밖에 없다. 싱겁게 다투지 말고 짭짤하게 잘 지내라는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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