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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강지처는 버리면 절대 안 됩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25 조회수1,317 추천수2 반대(0) 신고

 

사람이 태어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인이 돼 결혼 적령기가 되면 가정을 이루는 게 보편적인 일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게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도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왜 사람은 결혼을 하는 것일까요? 저야 지금 싱글로 있는 입장에서는 할 말이 아닙니다만 그게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종족을 보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이 결혼을 해서 남자가 아내를 버려도 그러니까 이혼을 해도 되느냐 입니다. 복음의 화두는 '아내를 버려도 되는 것입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표현은 그렇지만 달리 말하면 아내와 이혼을 해도 괜찮은지 이런 말과도 같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남과 남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도 서로 다 개성이 다르고 성격도 다 다른데 하물며 남과 남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며 산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보니 오늘날 이혼히 횡행하는 게 현실입니다. 말로는 결혼이라는 게 서로 사랑해서 한다고 젊어서는 그렇게 말을 하긴 하지만 실제 그 내면을 보면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이 숨어 있다고 보는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이혼하는 가정의 내면을 보게 되면 이런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무의식 속에 상대에게 덕을 보려는 심보가 있습니다. 더 냉혹하게 말하면 상대로부터 더 이상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빚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처음 서로가 만나서 가정을 이룰 때 덕을 본다는 개념보다는 만약 자신이 상대에게 희생할 각오로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게 된다면 과연 한 가정이 깨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희생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덕은 사랑입니다. 남으로부터 사랑만 받을려고 하니 이혼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먼저 희생을 하려고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서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흔히 하는 표현 중에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보면 조강지처를 세상에서는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잘못 알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의미가 전성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은 그렇게 인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게 보면 언제 등장하는지 아세요? 가령 남자가 먼저 결혼하여 결혼한 아내를 두고 새로 바람이 나서 딴 살림을 차리고 부인이 둘 있을 때 첫 번째 결혼한 부인을 보통 이런 경우에 조강지처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실제 조강지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한자 본래의 의미 속에 있는 그대로 입니다. 가난을 함께한 아내를 말합니다. 후한서의 송홍전에서 유래한 말입니다만 이 말의 의미는 한번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보시면 가정을 가진 남자에게는 큰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 표현을 하자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황이 달라졌다고 일반 평범한 부인도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해 가정을 가졌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조강지처를 버린다는 것은 제가 남자인 입장이지만 그건 인간의 탈을 쓰고는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치부할 것입니다. 물론 이혼을 하는 경우는 정말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표현한 것처럼 상대에게서 어떤 것이 됐든지 상대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웠던 과거 조선시대에도 여자가 칠거지악에 해당돼 내쫒길 그런 상황에서도 삼불거에 해당되면 내쫓을 수 없는 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결혼 전에 가난했는데 혼인 후에집안을 일으켜 세운 부인은 내쫓을 수 없다고 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런 사상은 왜 있었겠습니까? 그당시 문화는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인 시대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면 그건 단순히 한 여인을 여인으로 보기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인간의 탈을 쓰고 사는 데 필요한 인본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은 단순히 이혼에 대한 말씀이지만 이 이혼을 단순히 이혼에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보다도 좀 더 넓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을 표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과 결혼을 했다고 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나 수녀님을 표현할 때 그런 표현을 하기도 하고 수도자가 되려고 할 때도 남녀 불문하고 그렇게 표현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저희도 하느님과 결혼한 것입니다. 어쩌면 세례성사가 하느님과 결혼하는 혼인식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한몸이 되겠다고 혼인서약을 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표현을 하면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사한 존재라서 처음엔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과 결혼을 했지만 어떻게 살다 보니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우리는 경우에 하느님이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방적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내쫓은 게 아니라 인간인 우리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버린다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버리는 것입니다. 좀 더 순화해서 표현하면 등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날 달리 표현하면 냉담과도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에 관한 질문을 했지만 모세의 율법에 그렇게 규정된 이유가 바로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완고함이 바로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과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혼인관계도 그렇습니다. 물론 다 하느님을 등지는 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시적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오랜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느님을 등지는 것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등지는 게 하느님이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다른 이유도 우리 인간에게는 다른 이유가 되지만 그 이유도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로 하느님과 결혼을 할 땐 그땐 철이 없어서 몰랐다고 해도 하느님과 우리가 결혼을 할 땐 그 결혼의 의미 속에는 하느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고 하는 무언의 약속이 세례성사에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세례 때 그런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런 말이 어디에 나오냐고 묻게 된다면 그것은 꼭 성문규정으로 정해져 있어야만 존재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남남이 만나서 백년해로 하는 부부가 있다면 그 부부가 평생동안 사랑해서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힘든 시기도 있었을 겁니다. 그 힘든 시기를 견디고 사랑으로 서로 품고 살아야만 그게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인내했을 때만 부부가 백년해로할 수가 있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오늘 독서 말씀처럼 신앙의 여정에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해도, 욥처럼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도, 끝까지 견디어 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듯이 우리도 끝까지 우리의 하느님과 맺은 신앙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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