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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27 조회수822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과연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최종 관문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생각하게 하는 묵상이 될 수 있습니다. 부자청년은 오늘날로 보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켰다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나머지 그 생각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의도로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보시면 어떤가요? 먼저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것 자체가 기특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이 사람에게는 부족한 게 하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재물을 나누는 자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일까요? 그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부자라고 하면 재물을 많이 가진 것만을 가지고 부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부자를 바라본다면 오늘 복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하면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부자에 대한 인식과 예수님께서 인식하는 부자에 대한 인식이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묵상한 바로는 예수님이 인식하는 부자는 단순히 재물이 많은 사람을 부자로 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진 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과 함께 우리는 과부의 헌금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지 잘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제가 뜬금없이 과부의 헌금을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물질을 이야기할 때 과부의 헌금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과부의 헌금이 말하는 본질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금의 액수보다는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과부의 헌금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간혹 잘못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은행에 돈을 예탁할 때 은행을 신뢰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예금한 금액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이 없다면 은행에 예금을 예치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사실을 오늘 복음과 연관시켜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설령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자선을 하는 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최종적인 관문이 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울상이 돼 슬퍼하며 떠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부자이지만 하느님께서 보시는 부자는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물질도 세상 은행처럼 그런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인색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확실하게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재물을 하느님을 위해서 내놓다는 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재물에 대해 가지는 인식을 좀 달리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면서 재물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재물도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재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많은 재물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점을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쌓아놓은 재물은 이 세상에서 살 때만 재물로서의 가치가 있지만 그걸 하늘에 쌓아놓으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마치 은행에 예치한 것처럼 하늘나라에 보물로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물질적인 봉헌으로 믿음을 절대적으로 평가는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양만큼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말해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럴 때 이런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인용하는 말씀이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건 과부의 헌금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누카복음 12장 34절에 나오는 말씀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에 나오는 보물은 과연 우리가 아는 그런 보물의 개념일까요? 이건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물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헌금봉헌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세상이 말하는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봉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저희 본당에 교무금을 제일 많이 내는 자매님이 계십니다. 사실 제가 영세를 받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저희 본당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매님이 온전한 십일조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인간적인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이분 역시도 온전한 십일조를 한다고 해서 결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해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십일조를 하는 그 믿음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누카복음 12장 34절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내가 하느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큼이나 하느님께 물질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까워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로만 봐서도 그 자매님의 교무금을 보면서 그 자매님의 믿음에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자기가 사는 범위 밖의 재물은 더 이상 재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인식과 함께 그 재물이 더 훌륭한 재물이 될 수 있게 되려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잘 묵상해본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물질을 바라봐야 할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하늘나라에 가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땐 이미 버스는 지나간 것입니다. 그때 세상에서 살 때 좀 더 하늘나라에 보물을 더 많이 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이 세상에 살 때 열심히 하늘나라에 우리는 보물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이 보물은 단순히 물질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만 국한해서 생각한다면 물질이겠지만 우리는 더 넓게 본다면 이 세상을 살면서 하는 선행도 포함될 것입니다. 남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하늘나라에 쌓는 보물이 될 것입니다. 어쨋든 우리는 이런 보물을 많이 쌓아야만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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