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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의 수요일을 시작하면서........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01 조회수1,087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이제 사순이 시작됩니다. 영세를 받고 12번 째 맞이하는 사순입니다. 이번 사순만큼은 정말 사순을 의미있게 보내고 싶습니다. 사순 중반 이후에 2박 3일로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부산교구 자매님 네 분을 모시고 갔는데 이번에도 그분들과 가게 되었습니다. 3월 25일, 26일, 27일 이렇게 갔다 올 것입니다. 작년에 위령성월에 우연히 만나서 전주교구에 있는 유명성지를 다녀오면서 내려오는 길에 제가 만약 다음에 가게 된다면 사순 때 갈매못을 추천드렸습니다. 해미성지, 홍주성지 이렇게 서해쪽을 가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느 성지나 다 똑같겠지만 이왕이면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곳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몇 달 전에 홍성남 신부님의 유튜브 강의를 듣고서 생각한 게 있었습니다. 올 사순 때는 사순 분위기라고 해서 너무 우울한 사순 기분을 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냥 기본적인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선에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뜻 안에서 잘 살려고 해야 하는가 이런 데만 초점을 맞추고 생활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서 든 생각이 아니라 최근에 여러 가지로 한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위령성월에 항상 듣는 강론도 있고 또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 묵상입니다. 며칠 전에도 우리 사회에 인문학적으로 사회에 많은 좋은 가르침을 주신 이어령 교수님께서 타계를 하셨습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이분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부터 이분의 책을 보면서 한 생각입니다. 원래 해박한 어른이시지만 늦게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신 분인데도 그분이 저술한 기독교 사상을 담은 저서를 보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깊은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으셨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수님을 이런 시각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감동입니다. 이건 단순한 지식만을 가지고 그렇게 사유해서 얻어낸 결론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평소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제가 이분이 저술한 책에서 기독교 신앙에 관한 책을 읽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개종 후에 알고 있는 개신교 장로님이 선물해 주신 책이었습니다. 치과의사로서 해마다 빈민국에 자비로 의료봉사를 매년 가시는 분입니다. 인간적으로 개인적으로 종교를 떠나서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부터 이분의 학식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이런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부러웠습니다. 그런 분도 시간이 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위령성월도 아닌데도 죽음을 많이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는 운전을 하면서 묵상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시한부 인생'입니다. 

 

사실 우리는 시한부 인생 하면 마치 암 선고를 받은 환자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만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일까요? 잘 생각하면 우리는 누구나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과 똑같습니다. 다만 그 죽음이라는 시점이 좀 가까이 있고 멀리 있다는 그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유명한 철학자가 한 말인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실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죽음이 다가온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은 죽음의 막바지 순간에 죽음을 잘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도 분명히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운 존재이지만 그 두려움도 넘어설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 분야를 평소 연구한 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은 누구나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이 종교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무신론자가 아니라면 어떤 절대자를 만난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은 바로 그 대상이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을 살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꼭 죽음에 임박해서 하는 후회가 있다면 가장 공통적인 후회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이건 종교를 떠나서 바로 '사랑과 베풂'이라고 합니다. 살면서 좀 더 왜 사랑을 하지 않았던가? 살면서 좀 더 베풀지 않았던가? 왜 그때 그 사람들이 그런 후회를 하게 된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을 연구한 학자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사람이 살면서 사는 동안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아본들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간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인식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순간에는 이런 게 주마등처럼 인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이 기사를 본 후에 아는 형제님 사무실에서 이 기사를 이야기하니 형제님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우연히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뇌파를 측정하면서 나온 사실입니다. 죽음이 임박하기 전에 30초 가량 인간은 과거로 여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심장 맥박이 멈춘 후에도 짦은 시간 뇌파는 활성화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기사를 봤을 때 마치 임사체험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 실존한다는 것이 이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될 날도 멀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 내에서 출판된 서적에서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준한 책에도 이런 부분이 나오는 책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는 살면서 붙들지 않아도 아니 붙들 수도 없는 게 시간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을 만나는 그 시간은 반드시 오게 돼 있습니다. 좋든 싫든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왜 하느님을 만나는 데 싫다는 표현을 하는가 하고 의아해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을 산다는 게 하느님을 만나는 준비를 하는 과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치 결혼식에서 신랑을 만나기 위해 신부가 신부화장을 하며 단장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의 여정과도 같다고 표현해도 맞지 않을까요? 그런 준비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만난다는 사실이 기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두려운 시간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겁니다. 바로 그건 자신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평소에 잘 준비를 하며 그런 시간을 차곡차곡 잘 비축하였지 여부에 따라 결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 사순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 첫 스타트가 바로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이 예식은 우리의 삶이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하는 날입니다. 결국 한 줌의 흙이 되긴 하지만 만약 그렇게만 끝난다면 그건 정말 우리의 삶이 아주 덧없는 삶이 되겠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후에 펼쳐질 삶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삶이 있다는 걸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느님 당신이 그리스도로 자처하시며 이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이 세상에서 이 재처럼 어떤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활활 타서 나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그런 재의 수요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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