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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04 조회수1,671 추천수10 반대(0)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구독신청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본당 신부님의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큰 힘이 됩니다. 며칠 전 홍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한 본당에서 같은 주일에 잡지 두 곳이 홍보를 왔다고 합니다. 젊은 수사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구독신청이 적을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잡지를 홍보하러 왔던 형제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사님이 만드는 잡지를 많이 구독해 주세요. 여유가 있으시면 저희 잡지도 구독해 주세요.’ 그렇게 말을 마치니, 꽉 막혔던 마음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듯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들이 형제님의 잡지를 많이 신청하셔서 놀랐다고 합니다. 수사님의 잡지도 평소보다 많이 신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은 1등만을 알아주고, 경쟁에서 이겨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저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오늘 샬롯 성 이윤일 요한 성당으로 홍보를 가려합니다.

 

이제 곧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하나이기에 후보들의 경쟁은 치열합니다. 정책을 만들고, 공약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보다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는 후보들이 토론을 통해서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거짓된 정보로 상대방을 모함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국민은 없을 것입니다. 상대의 정책과 공약 중에서 좋은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국민을 위해 충실하게 일하려는 후보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후보들 간의 비열한 경쟁이나 모함의 난장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후보들이 자신들의 정책과 비전을 드러내는 멋지고 아름다운 축제의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난장판을 만드는 것도, 축제의 자리로 만드는 것도 현명한 국민들의 선택입니다. 검증이라는 이유로 후보들의 작은 허물을 침소봉대하는 언론의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후보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아닙니다. 후보들의 정책 실현 능력을 알고 싶어 합니다.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하고,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눔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예수님께서도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신앙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에게 해 주는 덕담이 있습니다. 서로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서로에게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따지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더 큰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좌 신부가 그럴 수가 있나.’라고 험담하기보다는 보좌 신부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면 더 큰 신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죄인을 받아 주셨고, 아픈 이를 위로해 주셨고, 배고픈 이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넘어진 이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탕아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 주고, 품어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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