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순 제1주일 독서 묵상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06 조회수660 추천수0 반대(0) 신고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    ( 출애굽기 16 장 )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신명26,4-10)

 

"주님께서는 강한 손과 뻗은 팔로,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 다음에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 앞에 놓고,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8-10)

 

신명기 26장 8절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그들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하신 초자연적 역사로 가능했음을 다섯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강한 손', '뻗은 팔', '큰 공포', '표징', '기적' 과 같은 생생한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역사(役事)에 큰 감동을 받았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신명기 26장 8절에서 '공포'로 번역된 '베모라'(bemora)는 '~로써'라는 의미를 가진 수단의 전치사 '뻬'(be)와 '두려워하다'란 의미의 '야라'(yara)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모라'(mora)가 합하여진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큰 두려움으로써' 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하느님의 표징과 기적과 대등한 표현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또한 이 단어가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표징에 대해서도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두려움을 일으킬 만한 하느님의 주권적인 행사나 표징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신명34,12).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여기서 '저희를 ~이끌어 내셨습니다'로 번역된 '와요치에누'(wayotsienu)는 '와우'(wau) 접속사와 '밖으로 나가다' 란 의미를 가진 '야차'(yatsa)동사의 사역형 미완료에 1인칭 복수 접미어가 합하여진 말이다.

 

따라서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가 저희를(우리를)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로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당신 백성을 세상의 노예된 상태에서 밖으로 끌어내어 당신에게로 향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은 과거에 머물던 세상과 현재의 세상을 뚜렷이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지녔던 옛 모습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인도해주신 새로운 세상에서 새 모습을 입고 구원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낳게 한다.

 

'그리고 저희를 이곳을 데리고 오시어'

 

여기서 '그리고 저희를 ~ 데리고 오시어'로 번역된 '와예비에누'(wayebienu)는 '와우'(wau) 접속사와 '오다'는 의미인 '뽀'(bo)의 사역형 미완료에 3인칭 단수 주격 접미어 및  1인칭 복수 목적격 접미어가 합하여진 말이다. 이것을 번역하면 '그리고 그가 저희를(우리를) 오게 하였다' 이다.

 

여기서 '와우' 계속법이 의미하는 것은 신명기 26장 8절에서 하느님께서 표징과 기적과 큰 공포와 강한 구원의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 밖으로 끌어낸 목적이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오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새 성경은 신명기 26장 8절과 9절에 사용된 주동사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와 '데리고 오시어'로 번역했는데, 원문도 '밖으로 나오게 하다'와 '오게하다' 란 구별된 단어를 사용하여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다. 즉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목적을 확연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

 

'이제'로 번역된 '앗타'(atha)란 말 뒤에는 '보라'는 의미를 가지는 '힌네'(hinne)가 따라나왔다. 따라서 '앗타 힌네'(atha hinne)는 '이제 보십시오'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 경배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저희가 ~ 가져왔습니다'로 번역된 '헤베티'(hebethi)는 '오다'라는 뜻의 '뽀'(bo)동사의  사역형 완료 1인칭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내가 인도하였나이다' 이다. 이 동사 '헤베티'의 어근은 신명기 26장 9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오게 할 때 사용된 단어 '와예비에누'(wayebienu)의 어근과 동일하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열매(수확의 맏물)을 하느님 대전에 가져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신 것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신 은혜를 철저하게 기억하며감사드리는 가운데 보답하는 성실한 반응이다.

 

'그런 다음에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 앞에 놓고,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너희는 ~경배드려야 한다'로 번역된 '웨히솃타하위타'(wehishethahawitha)에서 원형은 '구푸리다'는 의미의 '샤하'(shaha)이지만, 본문에서는 '샤하'(shaha)의 재귀형 완료 2인칭으로 쓰였으므로, '너는 스스로 몸을 엎드려야 한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동사의 실례를 살펴보면, 약자가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서 스스로 엎드리는 문맥에서 사용되거나 (창세37,9; 1사무24,8; 2사무9,8), 사람이 하느님 혹은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여호23,16; 1열왕9,6; 2열왕5,18; 19,37).

 

경배는 상대의 주권적 명령에 대하여 철저히 순종하며, 그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대전에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적으로 하느님을 높이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경배가 수확의 맏물(첫 열매)을 드리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경배는 특별히 그 열매를 하느님께 드린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사순 제1주일

 

 사순 제1주일 제2독서 (로마10,8-13)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9-10)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은 믿음의 의로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하고'로 번역된 '호몰로게세스'(homollogeses)의 원형 '호몰레게오'(homollogeo; confess)는 '함께', '동시에'란 뜻을 지닌 '호무'(homu)와 '말함' 이란 뜻이 있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함께 말하다', '동시에 말하다'라는 뜻이 있고, 실제로는 주로 법정 서약과 약속 혹은 고백 행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이러한 고백은 공개적 성격을 갖는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서원하다'라는 뜻의 '나다르'(nadar), '맹세하다' 라는 뜻의 '샤바'(shaba)등의 역어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호몰레게오'(homollogeo)를 '공개적으로 고백 또는 진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9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하고 진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퀴리오스'(kyrios)는 일반적 경칭으로 영어의 'Sir'이나 독일어의 'Herr' 의 의미가 있다.

 로마 황제의 일반적 호칭이었다. 즉 황제를 신으로 여기고 숭배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③ 그리스 신들의 이름 앞에 붙여, 인간과 다른 영역에 있는 신을 나타낸다.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70인역(LXX)에서 하느님의 명칭인 야훼의 역어로 사용되어 유일신을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누가 예수님을 '퀴리오스'(kyrios)라고 공적으로 진술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황제, 더 나아가 신적 존재 혹은 유일신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자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분께 드리는 것이 된다.

즉 이러한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시금석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Dominus)로 시인할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神聖)과 존귀하심, 그리고 믿는 자 자신이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 사이에 이것은 신앙 고백의 신조(credo)로 사용되었고, 세례의식에서 고백의 문구로 사용되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조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공개적 진술과 함께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모두 필수이지만, 굳이 논리적 순서를 따진다면 '믿음'이 '고백'에 우선한다.

 

여기서 '믿으면'으로 번역된 '피스튜세스'(pisteuses)는 '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다.

특히 여기서 과거의 일회적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시제인 부정 과거형을 사용하여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 믿음임을 보여준다.

 

이 믿음은 앞에 나온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의 근거가 된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서 요구되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단정짓는데, 이 부활에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모두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는 확고한 확신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서약이기도 하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0) 

 

로마서 10장 10절은 로마서의 주제인 믿음으로 의로움(구원)에 이르는 원리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고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이다. 9절의 말씀이 순서가 바뀌어 서술되고 있고 9절 내용의 반복이다.

 

인간 구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회복하고 내면에서부터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거기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으로'로 번역된 '카르디아'(kardia; heart)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흔히 '마음'으로 번역하는 이 단어는 고전 그리스어 문헌에서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스어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히브리어 '레브'(leb) '레바브'(lebab)의 역어로 나온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러한 단어는 인간의 영적, 지적 생활의 자리, 곧 인간의 내적 본성이며, 책임의 자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마음에서 나온 것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내면 전체의 인간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카르디아'(kardia)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자리이며, 그곳에서 맨 처음에 하느님께 순종할 것인지,거부할 것인지의 문제가 결정된다. 그것은 불신앙의 자리도 되고, 신앙의 자리도 되는 것이다.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 믿음은 감상적 충동이나 추상적 사상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믿음의 고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10절에서 그 결과로 제시하고 있는 '의로움'과 '구원'은 동일한 의미이다. 

또한 여기서 '믿어'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타이'(pisteuetai)나 '고백하여'에 해당하는 '호몰로게이타이'(homollogeitai)가 모두  현재 수동태 3인칭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3인칭 단수형은 믿고 고백하는 주체가 각 개인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형이란 사실은 이러한 믿음과 고백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믿음과 고백의 주체가 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일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신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은총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사순 제1주일: 가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