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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가 마지막 날에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인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06 조회수1,020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심판의 최종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우리가 살면서 우리 주위 이웃에게 어떤 사랑을 나누었는가 입니다. 그 이웃은 바로 '가장 작은 이'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작은 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에 나오는 복음이 생각납니다. 네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런 질문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주일 미사를 마친 후에 귀가를 하면서 월요일 복음이 무슨 내용인지 잠시 폰으로 검색해봤습니다. 최후의 심판이었습니다. 나름 복음 묵상 주제를 '작은 이'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묵상을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굳이 내용을 두 번씩이나 상반된 내용을 말씀하셨을까도 묵상해봤습니다. 사실 내용만 본다면 하나의 사실만 언급하셔도 충분히 반대되는 상황을 인식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 정도로도 해석을 하지 못할 사람이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먼저 복 받는 사람들의 대상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복을 받지 못할 사람들을 언급하셨습니다. 만약에 복 받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면서 그와 반대되는 사람들의 행동의 결과에는 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는 게 일반적인 논리인데 그와 같은 논리로 전개하지 않으시고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표현에도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을 거란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듣게 되는 말씀 중에서 가장 두려운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저주의 말을 들어도 좋지 않을 텐데 하느님으로부터 저주의 말을 듣게 된다면 이 얼마나 끔직한 상황이겠습니까? 선으로 가득찬 분의 입에서 그런 말씀을 듣게 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이와 같은 말은 절대 듣지 않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으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성당과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하늘나라에만 계신다고 생각하면 이런 우를 범할 우려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은 우리 주위에서 지근거리에 항상 계셨다는 뜻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보면 예수님은 하늘나라에도 계시지만 사람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 속에 계셨는가요? 바로 힘 없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도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과 같은 그런 화려한 궁에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보잘것없는 사람들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을 때 항상 거룩한 곳에 계실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살면서 오늘 복음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반성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설령 무시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만 본다면 누구나 뜨끔할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잘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히려 어쩌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더 못할 수도 있을까요? 하느님 말씀의 본질을 잘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머리로만 받아들이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이라고는 인식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으로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연민의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지 외형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바라볼 때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건 외형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작은 이라는 게 단순히 우리가 아는 불쌍한 사람만이 작은 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해당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더 넓게 본다면 어쩌면 영혼이 병든 사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영혼이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육체는 건강할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사실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작은 이라는 범주에 넣고 생각하기는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는 절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 정도 경지까지에 이르려면 정말 복음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깨우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실제 우리는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영혼만이 그런 사람을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 스스로 그런 작은 이를 당신과 동일시하였다는 사실에 공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절대 공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가장 쉬운 답이 되겠지만 그게 머리로만 인식이 될 뿐 실제로는 피부로 잘 와 닿는 말씀이 아니고 실천도 또한 잘 안 되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한낱 허공에 떠도는 공허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금부터서라도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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