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회개와 설교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09 조회수1,216 추천수4 반대(0) 신고

 

말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말 하나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말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유명한 말입니다. 이 두 철학자의 말을 바탕으로 말인 언어와 인간의 생각을 같이 묶어 한번 생각해본다면 인간이란 생각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생각으로부터 파생돼서 하나의 깊은 울림을 세상에 줄 수 있는 힘은 바로 생각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체인 '사유'입니다.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힘도 바로 이런 사유에서 빚어진다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은 인간의 문명사에서도 한 문명을 화려하게 꽃피어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그 말씀 자체가 하느님의 본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선은 이 세상 그 어떤 악도 하느님의 본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으로 인해서 죄라는 것을 짓게 되었을 때 그 죄로 기울 수 있었던 유혹의 근원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뱀이 한 말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를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럴지도 모를 거야'라는 추측이었던 것입니다. 뱀이 화와에게 한 말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내뱉는 말입니다. 우리도 뱀처럼 우리가 내뱉는 말 속에는 뱀의 모습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실제로는 뱀처럼 말하며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뱀이 화와를 꾀어 죄로 넘어갈 수 있는 유혹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한 원인은 하느님의 생각을 왜곡해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 화와에게 말을 했기 때문에 화와는 그만 그 말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때 화와가 이성적으로 잘 판단하지 못한 실수 때문에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화와와 같은 속성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화와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화와가 뱀이 한 말에 대해서 뱀의 존재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유혹을 차단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겁니다. 

 

뱀의 존재을 알 수 있으려면 뱀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평소 말을 했는지를 보면 판단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언어가 가진 속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하느님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듣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거기서 더 나아가 말씀을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게 '묵상'입니다. 묵상이라는 것은 단순한 생각과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 말씀을 깊이 사유해서 나온 결과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냥 단순한 결과물만 가지고 하느님을 우리 피조물이 이해를 한다면은 그건 가당치않은 말이 될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최소한 해야 하느님을 어느 정도는 알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도 선행되지 않으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또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살 수 있다는 것도 한낱 거짓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한번 잘 주목해보겠습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회개도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도 할 수도 있지만 그걸 모를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를 하는 데 보조적으로 필요한 게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풀어서 말한 것과도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즘 현대판으로 이야기한다면 바로 우리가 미사 때 신부님으로부터 듣는 강론에 해당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전례 때 말씀을 선포하시는 자리에서 말씀과 함께 전해주시는 신부님의 강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더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말씀과도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와 함께 우리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하는 생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묵상이라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그만큼 묵상의 깊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그만큼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간과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상대방인 연인을 더 잘 이해하려면 또 상대방을 사랑하려면 연인의 마음을 잘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없이는 결코 연인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하느님으로 눈을 돌리면 바로 그 마음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생각하려는데 필요한 도구가 바로 말씀의 '묵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사랑하는 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 말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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