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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을 의식하는 사람,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14 조회수1,178 추천수3 반대(0) 신고

 

사람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여러 욕구 중에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과시욕이 있습니다. 오늘 퇴근하는 길에 홍성남 신부님의 유튜브 강론을 들었습니다. 간혹 신부님의 강의를 듣습니다. 강의는 이와 같은 주제였는데 조금 성질을 달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성질을 달리하지만 인간 속에 내재하는 모든 욕구는 공통분모가 있는 듯합니다.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는 보편적으로 정상적인 기준에 들어가지만 그 정도가 어느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그건 문제가 되는 욕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욕구, 욕망이 현대에 와서는 옛날 중세시대와 같은 잣대로 평가를 한다면 우리는 죄라는 구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요즘 현대 심리학에서는 특히 과시욕이나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내면의 결핍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현상을 사람이면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치부를 했습니다. 요즘도 그렇긴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달리 해석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하나의 병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입니다. 원심력과 구심력과도 같은 원리입니다. 마치 구심력은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고 원심력은 하느님을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과 어쩌면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게중심이 하느님쪽으로 쏠리느냐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쏠리느냐에 따라 우리는 교만으로 가느냐 겸손으로 가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느님 중심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행동은 오히려 정반대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인지 혹시 알고 계시는지요? 제가 지금까지 읽은 영성서적에서 답을 찾는다면 우리는 신앙인이라 하느님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사람을 더 많이 의식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인데도 우선 사람들의 평가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어리석은 일은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설령 하느님의 일을 하더라도 당장 하느님께서 알아주신다는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바로 눈에 가시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평판에 주목하려고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엄밀하고 냉혹하게 말한다면 그런 믿음이라면 사실 하느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런 하느님의 가치가 너무나도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고 지금 당장에 어떤 가시적인 결과물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신뢰를 못하는 하느님이라면 당연히 그런 하느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걸 잘 묵상해보면 어느 누구도 이 논리에 뜨끔하지 않을 사람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이중성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일반 사람보다도 율법이나 계명을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들은 그 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오히려 힘없는 사람들을 그걸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르고 실천 못하는 사람보다도 알고도 실천 못하는 사람이 더 책임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그들이 모른다는 사실이 더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게 있습니다. 바로 선생 이야기입니다.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문명을 이루고 살면서 발전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문명을 후세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선생'이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령 이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께서 부정하시려고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선생을 두 가지로 양분한다면 정말 어떤 사심도 없이 누군가를 깨우쳐주려고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선생이라면 그런 선생은 오히려 선생님이라고 대접을 해드리고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생은 마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남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포장하는 선생을 가리킬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선생의 삶은 이중적이고 위선석이고 가식적인 삶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런 삶을 경계하신 것일 겁니다. 결국 이 모든 게 다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을 산다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일은 결국에는 어떤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길은 교만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오늘 복음 마지막 말씀이 대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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